현재까지의 해외여행 일수를 헤아리면 1년은 족히 되고도 남는다는 안보현 씨. 성악을 전공한 그녀는 외국인 교수에게 사사받기 위해, 해외 뮤직 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공연을 보기 위해 등 여러 이유로 어려서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다. 대학 졸업 후 무대 위에 서는 성악가의 길 대신 무대 뒤에서 역할이 큰 공연기획자로 일하며, 4년 전부터 이탈리안 레스토랑 ‘라 칼라스’도 운영하고 있다. 이런 까닭에 요즘은 공연뿐만 아니라 와이너리 탐방 때문에 유럽을 자주 다니는 편이다. 특히 이탈리아에 가면 인접한 루가노 지역에 꼭 들를 만큼 스위스에 대한 관심도 많다. 자연과 사람이 이루어낸 솜씨가 잘 조화를 이룬 스위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꼭 함께 가고 싶은 곳이라고.
우리나라 면적의 1/2 정도 되는 이곳은 철도망이 전국 구석구석까지 연결되어 있어 이를 이용한 여행을 해볼 만하다. 시계의 나라로 유명한 만큼 기차가 연착되는 일 없이 제 시간에 도착, 출발하기 때문에 이를 근간으로 여행 계획을 세우면 일정에 차질이 생기거나 허투루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 절대 없다. 그래서 안보현 씨와 함께 기차 여행길에 올랐다.
1프라우 뮌스터 내부. 청록색 탑이 멀리서도 눈에 띄는 이곳은 샤갈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도시를 가로질러 흐르는 리마트 강. 오래전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축물과 거리의 회전목마가 어우러져 낭만적인 모습을 더한다.
3자코메티 관이 있는 쿤스트 하우스는 유명 작가의 좋은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4길드의 집을 개조한 미술관 내부의 화려한 천장.
수도 베른보다 더 많이 알려진 취리히는 그 자체가 문화이고 예술이다. 리마트 강을 따라 형성된 구시가지 곳곳에서는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은 최고의 예술품을 마주하게 된다. 여행 가이드북에도 빠짐없이 언급되는 프라우 뮌스터에는 샤갈이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고, 맞은편 그로스 뮌스터에는 자코메티가 만든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다. 심지어 강 오른쪽에 자리한 경찰청의 벽과 천장이 자코메티의 벽화로 장식되어 있을 정도. 그러나 도시 전체를 조망하면 화려하거나 웅장한 건물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다. 근면과 검소를 강조하는 개신교라서 소박하고 단순한 형태에 약간의 장식을 가미한 것이 일반적이다. 그중 다소 화려해 보인다 싶은 건물은 영락없이 예전의 상인 집단인 길드의 집. 지금은 카페, 레스토랑, 갤러리로 이용되는데 그 안으로 들어가면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우면 본능적으로 문화, 예술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것인가 보다. 갤러리로 사용되고 있는 길드의 집 문 안쪽 면에는 외부와 달리 좀 더 장식을 하고, 천장에도 화려한 조각이 새겨져 있다. 멋지고 근사하게 꾸미고 싶은 본심과 금욕, 절제하려는 상반된 마음에서 갈등한 흔적이 역력하다. 그렇지만 전반적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형태의 건물이 줄지어 서 있는 도시의 모습은 화려함과 예술성을 거침없이 드러낸 파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절제미가 녹아 있어서인지 다양한 숍이 자리하고 있는 구시가지의 골목길은 한참을 걸어 다니면서 보아도 싫증나지 않는다.
취리히에는 약 50개의 박물관과 1백 개가 넘는 아트 갤러리가 있는데, 그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쿤스트 하우스다.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자코메티 관에서는 초기 작품부터 아프리카 조각에서 영향을 받아 만든 빼빼 마른 형태의 조각을 한자리에서 감상할 수 있다. 한남동 리움 미술관에서 단 한 점 볼 수 있었던 그의 작품을 풍족하게 즐기는 호사도 누려볼 만하다. 이외에 샤갈, 피카소, 세잔, 뭉크 등 근대 회화가 전시되어 있다. 취리히에서 열리는 공연이나 다양한 문화 행사는 금융 도시답게 은행의 후원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든든한 지원 덕분인지 1년 내내 공연, 예술, 문화 행사가 끊이지 않는데, 이곳에서 문화의 향취를 흠뻑 맡는 기회를 놓치지 말 것.
1 1916~1917년까지 취리히에 머물렀던 레닌이 자주 갔던 카페 ‘오데온ODEON’. 당시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며 메뉴, 커피잔, 설탕 봉투 등에 그려진 레닌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2길드의 집을 레스토랑으로 개조한 곳. 음식 맛은 물론 계절 분위기를 살린 센터피스, 친절한 서비스가 특징이다.
3역에 있는 이정표의 노란색은 출발편, 흰색은 도착편의 기차 시각을 알려준다.
산속 고지대에 자리한 온천지 로이커바드
로이크 역에서 버스로 30여 분간 산길을 굽이굽이 올라가면 로이커바드에 도착한다. 해발 1400m부터 더 높은 곳까지 목조 가옥이 들어서 있는 모습을 보면 어떤 조건의 자연 속에서든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사람의 능력이 대단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깊은 산속 고지대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하루 390만 리터의 천연 온천수가 나오는 온천 지역. 해발 2700m에 고인 물이 땅으로 스며들어 해저 500m까지 흘러내려 그 물이 온천수로 뿜어져 나오는데 40여 년이 걸린다고 한다. 땅속으로 스며들어 ‘40여 년간 여행한 물’은 알프스의 미네랄, 칼슘 등 1백30여 가지 성분을 풍부하게 함유하고 있어 이곳은 스파뿐만 아니라 재활 클리닉 센터로도 유명하다. 스위스 국가대표 선수들의 치료소로 공식 지정되었을 정도.
스파뿐만 아니라 산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안보현 씨는 로이커바드에 도착하면서부터 지체 없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곳을 둘러싸고 있는 겜미Gemmi 산은 수원水源 지대이자 하이킹으로도 유명한 곳이기 때문이다. 목초지, 산맥, 호수, 빙하가 어우러진 자연을 제대로 느끼려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산에 올라야 하는 법. 길목마다 목적지 방향, 소요시간, 해발 등이 표시된 노란색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고, 난이도까지 적혀 있어 원하는 코스를 선택할 수 있다. 목에 종을 매고 ‘댕댕’ 소리를 내며 풀을 뜯어 먹는 소(이런 환경에서 신선한 풀을 먹으니 스위스의 우유, 치즈, 초콜릿이 맛있을 수밖에)가 있는 목초지를 지나 산과 계곡을 따라 오른다. 산을 따라 설치한 철로 만든 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아찔한 순간도 있지만 자연 속에 흡수되는 느낌을 받게 된다.
1해발 2700m에 달하는 겜미Gemmi 산 정상에 있는 산상 호수 다우벤제는 놓치지 말고 가볼 만한 곳.
2로이커바드는 평생 1천 일 이상을 온천지역에서 보냈다는 괴테를 비롯해 모파상, 뒤마 등 유명한 문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이곳에는 약 22개의 온천이 있는데 하이킹, 스키, 눈썰매 등 산악 스포츠를 즐기고 난 후 피로를 푸는 데 제격이다. 눈으로 자연 풍광을 즐기며 온천 풀에 몸을 담그고 있으면 “Thank you, God”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
3가파른 길에는 바닥 밑으로 사용하고 난 온천수가 흐르게 설치해서 빙판길이 생기지 않도록 했다고.
4하이킹 후 온천 풀에 들른 안보현 대표. 그녀의 추천 아이템은 저렴한 가격에 효과는 탁월한 마사지다.
산길을 오른 뒤 이쯤이면 되었다고 길을 멈추는 것은 큰 실수! 반드시 케이블카를 타고 겜미 산 정상까지 올라가야 한다. 2700m 정상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산 아래를 내려다보며 먹는 뢰슈티(Ro?sti, 감자를 얇게 썰어 프라이팬에 넣고 팬케이크 모양으로 익힌 것)와 사과주스는 소박한 밥상이지만 최상의 기분을 경험케 한다. 레스토랑 밖의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없이 만년설로 덮인 풍광은 지구 태초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산의 모습이 그대로 비쳐 데칼코마니 같은 영상이 펼쳐지는 산상호수 다우벤제는 가까이 보이지만 다녀오려면 1시간 정도 걸린다. 내친 김에 고요한 정적이 흐르는 그곳에서 말을 삼가고 호수까지 걷다 보면 색다른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하이킹을 하거나 스키, 눈썰매를 타고 나서 로이커바드 온천으로 가면 그야말로 완벽한 코스. “산과 호수가 공존하는 흔치 않은 트래킹을 즐길 수 있어서 좋고, 이후에 스파에서 피로를 풀 수 있다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안보현 씨 말마따나 ‘세상에 이런 곳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한 지역이다.
1브베의 와이너리는 유네스코가 선정한 단 세 곳의 포도밭 중 하나로 밭 사이를 걸으며 포도 따먹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레만 호수와 브베 지역이 한눈에 들어오는 풍광을 바라본 느낌은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을 듯.
2,3브베의 와이너리 마을.
4,5골든패스 클래식 기차. 1930년대 초 스타일의 외관에 벨에포크 양식으로 꾸민 객실은 기차 여행의 낭만을 더해주기에 충분하다. 7‘시옹 성이 있는 몽트뢰’라고 칭해질 만큼 대표적인 명소. 가운데 있는 성탑에 올라가면 레만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와인과 예술적 감성을 불러들이는 레만 호수
취리히에서 루체른을 거쳐 몽트뢰로 이어지는 골든 패스 라인은 스위스 기차 여행 코스 중 가장 아름다운 구간에 해당된다. 천장의 일부까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깥 풍경을 감상하기 좋은 파노라마 열차를 비롯해 180도 돌아가서 움직임이 자유로운 의자, 카우치형 소파 등 스타일이 다양해 마치 집 안에서처럼 편하게 앉아 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 기차 유리창을 통해 목초지, 만년설, 전통 가옥 샬레 등 스위스의 자연이 번갈아가며 나타나는 모습에 이어 레만 호수가 시야에 들어오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와’ 하고 탄성을 지르게 된다.
몽트뢰 역에 내리면 취리히나 로이커바드와는 또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데, 지중해 스타일이 묻어나는 이곳에서 유명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와인이다. 압구정동과 청담동처럼 경계 구분이 모호하게 몽트뢰 가까이 붙어 있는 브베에는 샤슬라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을 비롯해 스위스 와인을 맛볼 수 있는 와이너리가 많다. 와인 마니아 안보현 씨가 가장 기대했던 브베 지역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단 세 곳의 포도밭 중 하나. 비탈길에 계단형으로 포도나무를 심어 직사광선을 많이 흡수하고, 호수에서 반사된 태양빛까지 더해져 당도 높은 포도를 수확할 수 있다고 한다. 수출을 하지 않기 때문에 현지 외에는 맛보기 힘든 스위스 와인은 스테인리스 스틸 통에서 숙성시켜 영Young하고 가벼운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안보현 씨가 최고로 꼽은 것은 ‘데즐리’로 프루티하면서 드라이한 맛을 좋아하는 그녀의 입맛에 딱 맞는다고.
1‘시옹 성이 있는 몽트뢰’라고 칭해질 만큼 대표적인 명소. 가운데 있는 성탑에 올라가면 레만 호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2안보현 대표가 최고로 꼽은 와인 ‘데즐리’는 샤슬라 품종으로 만든 화이트 와인으로 프루티하면서도 드라이한 맛이 특징이다.
레만 호수를 따라 카페, 레스토랑, 고풍스러운 호텔이 늘어서 있는 몽트뢰는 수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을 준 곳이다. 소설 <롤리타>의 저자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잠시 머물며 집필하려 했다가 결국 세상을 떠날 때까지 16년간 몽트뢰에서 지냈다고 한다. 시인 바이런은 시옹 성 지하의 감옥을 보고 ‘시옹 성의 죄수’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호수 암반 위에 세워진 시옹 성은 몽트뢰를 대표하는 멋진 곳이지만, 이를 소재로 한 바이런의 작품 덕분에 더욱 유명해졌다. 이외에 오드리 헵번, 찰리 채플린, 헤르만 헤세, 빅토르 위고 등 수많은 예술가와 문인이 레만 호수 지역을 찾았다. 이 때문에 유명인의 동상이 많이 있는데, 록 밴드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가 호수를 향해 선 채 한 손에는 마이크를 들고 또 다른 한 손은 하늘로 힘차게 뻗은 모습이 가장 유명하다.
조상에게 물려받은 유산이나 자연경관 덕분에 관광자원을 벌어들이는 유럽 국가의 경우 낭만은 충만하지만 일처리가 명확치 않아 여행하다 한두 번은 골탕 먹게 마련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이와 달리 수려한 자연 못지않게 시스템이 잘되어 있고, 각자 맡은 임무를 똑 부러지게 처리해 반했다는 안보현 씨.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레만 호수 근처의 부티크 레스토랑에서 그와 함께 와인을 즐기고 싶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