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아내는 강제낙태, 남편은 강제 정관수술
소록도서 만난 70대 한센인 부부 이야기
특별법정 선 뒤 “국가가 제발 사과했으면”
21일 수화기 너머 김복자(74·가명)씨의 한숨 소리가 바닷 바람처럼 날아왔다. “마음이 아프요. 있는 사실 그대로 말했응께 속은 후련하지만 50년도 넘은 이야기를 언제까지 (법정에서) 해야 한단 말이요. 어서 국가가 사과를 좀 해줬으면 합니다.” 한센인 김씨는 지난 20일 서울고등법원 민사30부(재판장 강영수)가 마련한 소록도 특별 법정에 섰다. 김씨는 국가를 상대로 강제낙태 피해 손해배상 소송을 벌이는 한센인들 중 한명이다.
앞서 김씨는 지난 19일 한센인 마을 자치회관을 찾았다.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하기 전 변호사들과 상담을 하기 위해서다. “여그 팔뚝 보면 새까만 데 있죠잉. 꼬집어도 안아프더랑께.” 김씨가 옷 소매를 걷어올려 팔뚝을 보이자 검게 그을린 듯한 흔적이 보였다. 한때 그의 생명을 위협했던 한센병의 자취다. 그는 11살 때(1955년) 한센병을 앓기 시작했다. 집에 몰래 숨어살던 김씨는 어머니에 의해 1959년 소록도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학교를 다녔다. 병세는 차츰 호전됐다.
스물두살 때(1966년) 김씨의 마음을 설레게 한 이를 만났다. 김씨보다 한 살 많은 동네 오빠였다. 아담한 체구의 김씨 눈에는 큰 키를 가진 오빠가 멋있었다. 오빠도 한센인 환자였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던 그해 봄 김씨는 그의 아이를 가졌다.
하지만 소록도 병원은 한센인의 출산을 금지했다. 임신부는 소록도를 나가든지 낙태를 해야 했다. 무명천을 배로 꽁꽁 묶어 임신 사실을 숨겨보려 했지만 임신 넉달 만에 들통이 났다. 김씨는 병원에 불려가 수술대 위에 올랐다. “마취도 안하고 기계같은 게 몸 속으로 들어오는데 너무 아팠어요.” 그는 그때 죽을 것 같은 고통을 처음 느꼈다고 했다. “그 애가 지금 살아 있다면 마흔살이 넘었을 터인디….” 김씨는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김씨의 남편도 정관수술을 당했다. 김씨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김씨의 남편(75)은 “내가 왜 이 수술을 받아야 하냐며 저항을 해봤지만 들은 이야기는 ‘규칙을 다 알고 있지 않느냐’는 말뿐이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김씨 부부는 2세를 낳을 수 없게 됐지만 대신 소록도에서 부부로 살 권리를 얻었다. 이들은 지금도 소록도에 산다.
김씨는 재판 당일인 20일 특별 법정으로 꾸며진 국립 소록도병원 별관 2층 소회의실에서 정부 쪽 변호사의 질문에 답했다. “(마을 자치회에서) 시켜서 수술한게 맞나요?”, “시킹께 하죠. 여그 사람들은 원장이나…” , “대화도 없었나요?”, “네. 대화없이.”, “자녀를 키우고 싶었나요?”, “그렇죠. 어떻게든지.” “낙태 거부하면 퇴소해야 했습니까?”, “한센인은 자녀 있으면 다시 감염되니까 그런갑다 해서.”
1시간을 훌쩍 넘겨 진행된 심문에서 정부 쪽 변호사는 강제 수술이 아니라 본인 동의로 이뤄진 수술임을 확인하려 들었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사회적 약자’들이다. 정규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날 김씨는 정부 쪽 변호인의 심문을 힘들어 했다. 때론 동문서답의 답변도 했다. 반면 정부 쪽 증인으로 나선 공무원 증인들은 강제 낙태가 아니었다는 논리를 차분하게 전달했다. 한센인 쪽 변호단의 표정은 조금씩 어두워져갔다. 재판 마무리 발언으로 한센인 쪽 변호단은 “한센인들의 입장에서 부디 생각해 달라”고 재판부에 호소했다.
다음달 25일에는 서울에서 이번 소송의 최종 심문기일이 진행될 예정이다.
소록도/ 허재현 기자 cataluni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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