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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명기***/[*세상에 이런일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설향* 2011. 5. 5. 14:15

아우슈비츠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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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수용소

폴란드 남부크라쿠프에서 서쪽으로 50㎞ 지점에 위치한 아우슈비츠 문명을 배반한 야만의 극치이며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행위의 흔적이다.

 

나치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의 상징인 강제수용소로 잘 알려져

있는 아우슈비츠는 원래 인구 5만 명의 작은 공업도시로,

폴란드어로는 오슈비엥침 이라고 한다.

 

이 도시의 외곽에 있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는 겉으로

보기에는 평화로워 보인다. 하지만 수용소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생지옥을 만나게 된다.

 

학살한 시체를 태웠던 소각로, 카펫을 짜기 위해 모아둔

희생자들의 머리카락,

유대인들을 실어 나른 철로, 고문실 등이 끔찍했던

광기의 역사를 전해 준다.

 

4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비극의 현장


1940년 봄,친위대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를 세웠다.

 

그 해 6월 최초로 폴란드 정치범들이 수용되었고,

1941년 히틀러의 명령으로

대량 살해시설로 확대되었으며, 1942년부터

대학살을 시작하였다.

 

열차로 실려온 사람들 중 쇠약한 사람이나 노인,

어린이들은 곧바로

공동샤워실로 위장한 가스실로 보내 살해되었다.

 

이처럼 가스, 총살, 고문, 질병, 굶주림, 심지어는

인체실험을 당하여 죽은 사람이

4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3분의 2가 유대인이다.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

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었으며, 머리카락을

모아 카펫을 짰다. 뼈는 갈아서 골분비료까지

썼으니 사람의 몸뚱이 중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아우슈비츠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1945년 1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는 대량학살의

증거를 없애기 위해 막사를 불태우고 건물을 파괴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이 예상보다 빨리 도착해

수용소 건물과 막사의 일부가 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끝난 후, 1947년 폴란드의회에서는

이를 보존하기로 결정했다.

희생자를 위로하는 거대한 국제위령비를 비르케나우에

세웠으며, 수용소 터에 박물관을 건립하였다.

또한 나치의 잔학 행위에 희생된 사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유네스코는 1979년 아우슈비츠를

세계문화유산에 지정하였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들어 갈 때보다 돌아나오는

발걸음이 더 무거웠습니다. 나만 아니라

비극의 현장을 돌아보는 모든 방문자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침울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가스실 굴둑이 역사의 증인으로

 

 

 좌우로 있는 이중전기 철조망

 

 

 막사와 막사 사이에도 이중 전기 철조망이 설치


 

해묵은 포플러 나무가 그날의 참상을 알고 있겠지

 

 막사입구

 

캠프 오케스트라가 여기에서 행진곡을 연주하여 죄수들을

자연스럽게 집합시켜 인원을 점검 했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자들은 과거의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통행증명서

 

 임시 수용소에서 아우슈비츠 오기전 대기중인 유태인


 

 쓰고버린 독가스깡통 산터미를 이루었다.

 

 싸이클론 비(Cyklon B) 라는 독가스는 독일 데게슈

(Degesch)사가 생산해서,

 1941년부터 1944년 까지 약 30만 마르크의 이익을 내었다.


 

 까스실에서 나온 색이 바랜 머리털

 

 머리털이 산더미처럼 그날의 참상을

 

 가스실로 들어 가기전 모아놓은 안경들

 

 처형되기 직전 벗어 놓은 유대인 신발더미

 

 재활용을 위하여 쌓아놓은 옷가지들~  모든게 다 재활용이지만.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트렁크,

 브러쉬 종류, 신발, 식기, 신체장애자의 의수족 등이다.

 

 

 최고가의 법낭 그릇들


 

 가죽가방


 

 소유자의 이름 주소 생년월일이 적혀 있는 가죽트렁크,


 

 어린이들의 옷과 신발, 우유병 등은 관람자들을 안타깝게 한다.

 

 보석을 찾느라고, 뒤축이 떨어진 신발들

 

 면도용 부러쉬 및 머리빗들 

 

 당시의 구두약통

 

 처음 수용소로 들어올 때 수용소 관리국장으로부터

  "너희들이 출구 화장터의 연기 하나밖에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의복과 소지품들을 빼앗기고, 3가지 포즈의

사진을 찍어야만 했다.

 

 1943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된 사람들 초기에는

입소하면 정면 측면등 사진을 남겼으나

 그후 엄청난 사람이 들어 올 때는 그냥 까스실로 바로 갔다고 함.

 

 

 

 당시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으로 정전후 구출 되었다고 한다.

 

 비인륜적인 화장실


 

 고급 침실

 

 막사 입구

 

 독가스실 내부/30x15m 크기의 밀폐된 

 이 독가스 실에서 한번에 2백명씩의 유대인들이 죽어갔다

 가스실 내부, <추모의 꽃다발>

 

 독가스실에서 죽은 유대인 시체더미들은

 이 소각장에 옮겨져 한 줌의 재로 바뀌었다.

 

 사망후 많은 시체를 자동으로 태우는 곳




 

 아이러니하게 이젠 이수용소가 폴란드 제일의

관광 수입원이 되어버렸다.




  


 

 출처 : sebastianch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