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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나물캐기-윤두서

*설향* 2013. 7. 7. 23:53

나물캐기

윤두서 [나물캐기], 《윤씨가보》, 연도미상모시에 먹, 30.2 x 25 cm, 녹우당작품 정보 보러가기

따스한 봄날 들일이 한창인 여인의 뒤태를 포착했다. 한 여인은 양손에 망태기와 칼을 든 채 허리를 굽혀 나물을 캐고 있고, 다른 한 여인은 고개를 돌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두 아낙네 모두 머릿수건을 둘렀고, 치마를 무릎까지 걷어 올렸다. 이들이 서 있는 들녘은 돌멩이가 군데군데 흩어지고 잡목과 푸성귀가 보이는 비스듬한 언덕이다. 경사진 비탈길 너머에는 가파른 원산이 가로질렀고 하늘에는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다. 조선시대 시골 아낙네의 소박한 노동 장면. 주변물의 실제 경관 장면을 재현한 파격적인 풍속화. 윤두서(尹斗緖, 1668-1715)가 그린 [나물캐기]이다.

윤두서와 동행한 친구들

가문에 당화가 미칠 것을 염려하며 은둔 생활을 선택한 윤두서는 오로지 학문 연마와 서화 제작에만 몰두했다. 다행히 그의 곁에는 든든한 동기와 멋진 친구들이 항상 머물렀다. 형제인 윤창서(尹昌緖), 윤종서(尹宗緖), 윤흥서(尹興緖), 인척이자 친구인 심득경(沈得經 1629-1710), 이서(李漵, 1662-1723) 이잠(李潛)은 집안의 대소사에 조언을 해주고 학문을 연마했던 훌륭한 동학이자, 스스로 ‘우리 당(吾黨)’이라 부르며 평생을 어울린 지기지우였다. 이서는 1713년 가세가 기울어 윤두서가 한양 생활을 정리하고 해남으로 내려갈 때 “사십 년 동안 불과 열흘이나 한 달도 떨어져본 적이 없는데”라고 안타까워했고, 1748년 윤두서의 묘를 이장하면서 지은 제문에 ‘제2의 나(第二吾)’, ‘내 몸의 반쪽(吾一半身)’이라고 언술했다.

윤두서, [탁목백미도], 《가전보회》, 1706종이에 먹, 33.3 x 69 cm, 녹우당 작품 정보 보러가기

[탁목백미도(啄木百媚圖)]는 딱따구리 한 마리가 구부러진 나뭇가지 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화조도이다. 오른쪽 하단에는 “1706년 11월 11일에 제하다”라고 되어 있고 왼쪽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적혀있다.

탁탁 소리 내며 쪼고
벌레는 살아있는 나뭇가지에 생기네.
생동하는 나무에 봄이 가니
아리따운 울음소리로 온갖 아양을 떠는구나.

화사했던 봄날이 떠나감을 아쉬워하며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을 그리고 제문을 쓰기 한 달 여전, 절친했던 동료 이잠의 장살 사건이 있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뭇가지에 위태롭게 앉은 딱따구리는 친구 이잠을 잃고 어쩔 줄 모르는 윤두서 자신을 상징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지나간’ 봄은 이잠, 윤종서를 비롯한 ‘우리당’이 즐겁게 어울렸던 안타까운 과거일 것이다.

윤두서, [심득경 초상], 1710년비단에 색, 160.3 x 87.7 cm, 보물 1488호, 국립중앙박물관작품 정보 보러가기

또한 절친이었던 심득경이 1710년 8월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뜨자 이서는 문장을, 윤두서는 초상화를 도맡아 그를 애도했다. 현재 [심득경상]은 보물 1488호로 지정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심득경이 죽은 뒤 4개월 후인 11월에 완성된 이 작품은 윤두서가 남긴 유일한 전신 초상이며, 조선 후기 평복 차림의 사대부 초상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마련한 걸작이다. 동파관에 도포 차림을 한 심득경은 공수 자세를 취한 채 등받이 없는 의자에 단정하게 앉아있다. 도포는 담청으로, 술이 달린 띠는 명도와 채도가 높은 녹색으로 채색되었다. 수염 사이로 보이는 입술은 선홍색이며, 피부는 담홍색이어서 얼굴에 화색이 돈다. 가죽신을 신은 두 발은 양옆으로 벌어졌고 오른발이 살짝 들렸다. 얼굴의 외곽과 이목구비는 갈색 윤곽선으로 사용되었고, 눈썹은 윤두서의 자화상처럼 송충이 모양으로 그려졌다. 수염을 비롯하여, 속눈썹과 귀의 솜털까지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표현되었다.

화면 상단에는 예서체로 ‘정재처사심공진(定齋處士沈公眞)’, 양측에는 윤두서가 대필한 이서의 찬문이 적혀있다. 이서는 심득경의 신체적 특징을 “단단하고 빼어난 골격, 반듯하고 긴 얼굴, 밝고 향기로운 얼굴빛”이라고 기술했다. 나아가 “눈은 해맑고 코는 곧으며 입술은 붉고 치아는 가지런하다. 귀는 시원하고, 귀밑머리는 성글며, 눈썹은 단아하고 수염은 청결하다.”고 부언했다. 윤두서가 묘사한 심득경의 자태 그대로이다. 윤두서가 초상화를 완성하여 심득경의 집으로 보내자, 후손들이 ‘터럭 하나 틀리지 않음’에 깜짝 놀라며 공이 다시 살아오신 것 같다며 펑펑 울었다고 한다.

현장에 주목하고 현재를 사생하다.

윤두서, [목기깎기], 《윤씨가보》모시에 먹, 32.4 x 20 cm, 녹우당작품 정보 보러가기

윤두서는 여러 분야에 관심이 있는 다재다능한 지식인이었다. 고대의 법전, 백가, 병서 등을 두루 섭렵했고, 지리, 기술, 천문, 점술의 도구를 직접 개발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선거도(旋車圖)]와 같은 목기를 깎아내는 기구도를 완성할 수 있었다. 상단에 ‘공재언희작선거도(恭齋彦戱作旋車圖)’라고 표기된 이 그림은 공구와 기물에 대한 관심과 고증학적 학문 태도를 알려주는 기물도이다. 그림에 등장하는 두 장인은 회전차를 돌리면서 칼로 목기를 깎아내고 있다. 한 사람은 의자에 앉아 피대를 돌리고 있고, 한 사람은 긴 칼을 양손으로 잡은 채 커다란 함지박을 깎아내고 있다.

도구의 구조와 그것을 다루는 방법만을 구체적으로 재현하려는 듯, 윤두서는 부수적인 배경을 철저히 생략했고, 동일한 굵기의 철선묘를 사용하면서 자신의 관심사만을 묘사했다. ‘선거’의 사용 방법을 위한 그림 매뉴얼을 완성한 셈이다.

윤두서는 일반 백성들의 일상과 노동을 화폭에 솔직하게 재현했다. 이는 현장성과 사실성을 동시에 추구한 작업 태도이며, 이전의 화가들이 감히 시도하지 못했던 과감하면서도 독창적인 창작 방식이다. [짚신삼기]에서는 한 노인이 나무그늘 아래에 앉아서 짚신을 짜고 있다. 하단의 바위와 상단의 나무그늘이 인물상이 위치할 공간을 형성했고, 비스듬한 사선의 경사가 지면을 구획했다. 나뭇등걸은 음영법이 가미되었고 나무 잎사귀는 진한 먹을 듬뿍 머금은 필로 빠르게 구사되었다. 바위에서도 유사한 조형 언어가 발견된다. 그러나 인물상의 묘사는 다르다. 양쪽 엄지발가락에 끈을 끼워 잡아당기는 동작, 힘을 주고 있는 노인의 표정, 심지어 다리의 털까지 놓치지 않았다. 인체에 비해 얼굴은 크고 손과 발은 다소 작다. 얼굴에서도 이마는 넓고 코가 큰 반면 눈과 입은 자그마하다.

윤두서, [짚신삼기], 《윤씨가보》모시에 먹, 21.1 x 32.4 cm, 녹우당작품 정보 보러가기

윤두서, [낮잠자기], 《윤씨가보》비단에 먹, 21 x 25 cm, 녹우당작품 정보 보러가기

[짚신삼기]와 재질, 크기가 비슷하고 서명의 서체까지 동일한 작품이 바로 [낮잠자기]이다. 인물상이 나무 그늘 아래 배치된 수하인물형식이며 표현 방식도 유사하여 동시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짚신삼기]가 야외에서 생업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서민의 노동 현장이라면, [낮잠자기]는 선비의 한가로운 일상을 담은 휴식 장면이다. 그림 속의 선비는 나무그늘에 평상을 펼쳐놓고 베개에 기댄 채 달콤한 낮잠에 빠졌다. 무척 더운지 버선을 벗어 버린 맨발 차림이며, 평상 위에 부채가 놓였다.

윤두서, [경답목우도], 《윤씨가보》비단에 먹, 21 x 25 cm, 녹우당작품 정보 보러가기

[경답목우도] 역시 일상의 목가적인 전원을 있는 그대로 재현한 진경산수화이자, 농부의 일상을 목도한 풍속화이다. 앞선 두 작품과 달리 인물상이 점경으로 표시되었지만, 한 시점으로 포착된 한국의 산천과 전답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밭 한가운데의 농부는 소를 몰며 밭갈이가 한창인데, 저만치 떨어진 목동은 나무그늘 아래 풀숲을 이불 삼아 느긋하게 낮잠을 자면서 ‘농땡이’를 치고 있다.

윤두서는 조선시대 처음으로 시골 아낙네의 생업 현장을 소재로 삼은 ‘선비 화가’일 것이다. 바로 [나물캐기]이다. 윤두서의 [나물캐기]를 감상한 이하곤(李夏坤, 1677- 1724)은 “남쪽 지방에는 유독 머리에 수건 두르기를 좋아한다.”고 호남의 풍속을 지적했다. 이는 윤두서가 특정지역의 세세한 습속까지 모두 파악하여 그림에 담았음을 알려주는 증언이다. 남존여비와 남녀유별이 극에 달하던 양반 중심 사회의 지식인이 어떻게 이러한 소재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개념과 이론만을 논하는 풍조에서 벗어나 실제로 보고 들어 몸소 체득하려 했던 진전된 노력이 ‘참됨’과 ‘사실성’의 소중함을 깨우쳐 준 것이다. 게다가 직업 화가 이상의 손재주와 그림 솜씨까지 보태어져 당시로서는 파격적이고 혁신적인 풍속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해남으로 낙향하다.

윤두서는 1712년 양어머니인 청송 심씨가 타계하자 장례를 마무리하고 이듬해 해남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이라 할 수 없는 무척 고된 여정이었다. 13세에 상경하여 한양에서 30여 년을 살았으니, 챙겨야 할 가솔이나 이삿짐도 만만치 않았다. 해남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중요한 문서를 분실했다는 기록이 당시의 힘겹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알려준다. 해남으로 귀향한 윤두서는 연동의 종가에서 주로 생활하면서 가끔 백포의 별장을 들렸다. 해남에서도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염전을 만들고 농장을 확장하면서 합리적인 노비 제도를 경영하는 등 집안의 화목과 평화를 위해 힘썼다. 그러나 40대 중반 이후에 새롭게 경험하는 해남에서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습하고 더운 바닷가는 산으로 둘러싸인 한양의 풍토와 사뭇 달랐고, 눈이 어두워져 책을 읽거나 그림을 그리는 일도 쉽지 않았다.

1714년 정월 윤두서의 큰형 윤창서가 56세에 명을 달리했다. 큰형의 죽음이 큰 충격이었을까. 같은 해 11월 윤두서는 백련동 종가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초겨울에 걸린 감기가 원인이었던 것 같다. 한 지역을 움직였던 부호이자 명문가의 종손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으니, 가족뿐만 아니라 마을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게다가 윤두서 상 중에 전염병까지 돌아서 서둘러 장례를 끝내야만 했다. 명문가의 종손이자 시대를 앞서 간 지식인은 애달픈 인생을 뒤로 한 채 마흔 일곱의 아까운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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