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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화가 문인화***/동양화

[스크랩] 오진국의Violet Tulips-12

*설향* 2013. 7. 7. 23:49

 

 

Violet Tulips-12
2012 Digilog Artworks (3450) Image size 7,000 x 5,418 Pixels (108.5M) Resolution 300dpi.  

 

 

이 그림 속의 튜울립은 공산품처럼 제조일자로 따진다면 2005년산이다.
마치 꿈 속에서 아른거리는 보랏빛 이미지를 복사용지에 베껴오듯 조심스레 새 집으로 옮겨
심었다. 처음엔 토양도 다르고 환경도 달라서 말라 비틀어 죽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는데
그 가녀린 꽃들이 용케도 환경을 적응하며 조용히 안착한 모습이 여간 귀엽지 않았다. 그래도
오목히 쌓인 석고 받침이 그다지 싫지는 않았는지 환한 웃음으로 나를 쳐다보는 모습이 앙증
스러워 나 자신도 놀랐다.세상에 이런 훈훈함만 있다면, 세상에 이런 작은 미소만 있다면....
하고 한참이나 고갈된 마음을 풀어놓고 그림과 이야기를 하였다. 작은 정물이 주는 소담한
행복이란 여자들만의 것은 아닌가 보았다.그것도 나처럼 둔탁하고 거칠기 한정 없는 남자의
손에서 이런 그림도 나오는 것을 보면...........




 

 

 

느티나무의 四季-2-봄
2012 Digilog Artworks (3448) Image size 8,268 x 6,260 Pixels (148.1M) Resolution 300dpi.  

 


모든 예술 창작물은 결과로 말한다.
작가는 형식에 얽메이면 자의식이 유영하는 공간을 축소당하게 된다. 아무려면 내가 저까짓
느티나무 하나를 사진보다 더 정교하게 못 그리겠는가? 이미 나는 그런 차원을 벗어나 있고
그것보다는 훨씬 다른 차원을 갈구하기에 거침이 없는 것이다. 나는 기존의 아날로그 화가가
표현하지 못 하는 새롭고 경이로운 신비감을, 또 사진 작가가 흉내낼 수 없는 그림만의 아름
답고 다채로운 세계를 펼쳐 보이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쪽을 가도, 저 쪽을 가도 나는
영원한 이단자의 몰골이지만 어쩌랴? 길이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나는 간다.


  다음 글은 6년 전, 내가 처음으로 문학사상사에서 출간한 '오진국디지털그림세계'-1집
<내 사랑, 연이 되어>에 실렸던 글로써 이 작품의 원본에 해당되는 <느티나무의 사계>에
관한 글이다. 그 후, 단상을 겸한 단행본이 3권까지 나왔으니 시간이 유수같이 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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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릎나무과에 속하는 느티나무(Zelkova seraata)는 낙엽 활엽교목으로 우리나라 전 지역에서
자라는데 흔히 시골 부락 어귀에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는 정자역할을 한다.때로는 곧추섰던
마음들을 달래려 한걸음에 달려가 그 큰 그늘 아래서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하고 너그럽게 벌린
두 팔이 친정어머니 같이 느껴져 하염없는 하소연을 하는 곳도 이 느티나무이기에 많은 사람들
에게 한결 같은 사랑을 받나 싶다. ‘그래, 어디든 마음 붙이고 살아라. 어디 살건 네 마음먹기
에 달렸다’ 하시며 종종 걸음으로 떠나신 어머님을 태운 버스가 시골길에 뽀오얀 먼지를 남기고
가셨을 때도 아낙은 털썩 이 느티나무 아래에 퍼질고 앉았었다.


이런 느티나무도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풍성한 잎이 무거워 지면 황금색 낙엽으로 변하며 가을의 정취를 뽐내다가 앙상한 겨울가지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기도 한다. 이 그림은 그 사계절이라는 시간성과 여운으로 나타낼 수 있는
공간을 압축하여 하나의 화폭에 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Back side of Canvas-05
2012 Digilog Artworks (3457) Image size 5,000 x 5.000 Pixels (71.5M) Resolution 300dpi.  

 


발상의 전환으로 본다면 이면은 늘 흥미로운 것이다.
노출되어 있지 않은 여인의 속살처럼 들뜬 기대감으로 가득한 속성도 지녔다.이러한 이면,
또는 배면을 그린 이 반 추상 작품은 숨이 멎을듯한 화사함과 가슴에 차오르는 환희가 화폭
뒷면에 존재했을 것으로 상정하고 그러한 이미지를 형상화 한 것이다. 어쩌면 화가의 상상이
갖는 내면적 변화이기도 하고 마지막 표면(Surface)에 나타난 하나의 작품 뒤에 도사리고
있는 온갖 애환과 환희, 그리고 숨 막히는 열정의 거친 몸놀림인지도 모른다. 한바탕 굿판을
벌이고 다 떠나버린 놀이마당의 잔재인지도 모를, 그런 버려진 色과 形이 부정형하게 캔버스
뒤편에 각인되었다. 아무도 미처 그 과정을 들여다 봐 주는 이 없는 볼품없는 흔적들이지만
애정을 가지고 이면을 찬찬히 투시해 보면 어머니의 희생처럼 고귀하고 순결하기 그지없는
형상들일 수도 있기에 스쳐 지나갈 수 없는 것이다.



 

 

 

님이 오시는 날-3
2012 Digilog Artworks (3454) Image size 6,000 x 3,742 Pixels (64.2M) Resolution 300dpi.  


(오늘은 작품 단상을 생략합니다. 여러분이 풍부한 감성으로 써주실 것으로 믿고......)




 


 

 

Village-5
2012 Digilog Artworks (3455) Image size 7,157 x 5,138 Pixels (105.2M) Resolution 300dpi.



몇 년째 개작을 거듭해 온 이 작품은 드디어 이렇게 개벽을 하듯 환골탈퇴한 형상으로
다시 이 세상에 나왔다. 나도 이 그림이 이렇게 되라고는 상상도 못 한, 작업 프로세스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실감케 하는 우연성의 결과다. 벌써 몇 년이 지났을까? 집에서 사용
하는 가습기 포장을 뜯다가 발견한 Form 완충재의 형태가 아주 신기하여 두 짝을 캔버스에
붙이고 아크릴로 덧칠을 하여 반 입체 추상작품을 만들다 미완성인체 남여 두었는데 그것이
평범한 풍경화 유화작품을 만나 이리 대단한 사고를 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리저리 하여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나 스스로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였고 평범한 일상에서의 사고를 뛰어
넘는 발상의 전환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에 대해 다시금 생각케 하였다.
 
  노래방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보면 노래를 참 맛있게 부르는 사람이 있다.
그다지 성량이 풍부하지도 않고 '톤'이 부드럽지도 않음에도 맛깔스럽게 부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멋진 성대를 가지고 음색도 훌륭한데도 괜히 귀가 따갑거나 정감이 전혀 가지
않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듯이 그림도 잘 그리고 못 그리고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로
맛깔스런 그림이 있게 마련이다. 어떻게 하면 잘 부를까? 또는 잘 그릴까?가 아니라 예술
창작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하면 맛이 베이도록 표현해 낼 수 있는가가 중요한 관점이다.
한편으로 보면 예술가의 덕목 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요리사처럼 자신만의 비법으로

맛을 내는 기술인 지도 모르지 않은가?




 

 

 

Apartments
2012 Digilog Artworks (3441) Image size 5,000 x 5,000 Pixels (71.5M) Resolution 300dpi.

  


고사성어에 회사후소(繪事後素)란 말이 있다. 
그림 그리는 일은 흰 바탕이 있은 이후에 한다는 말로 본질이 있은 연후에 꾸밈이 있음을
말한다. 흰 바탕이란 본질이 없으면 제대로 그림을 이룰 수 없음인데 특히 인쇄나 프린트를
해보면 바탕색의 중요감을 실감케 된다. 그것은 아마도 비유에 불과할 것이고 매사에 본질을
망각한 허튼 포장이나 치장을 하지 말라는 뜻일 것이다.


설혹 내가 그림의 주제를 집합주택인 아파트로 가닥을 잡았다고 치자.
내가 무슨 분양 팜프렛의 투시도도 아니고 그 성냥곽 같은 외관을 무엇 하러  그리겠는가?
사람들이 모여사는 군락의 상징인 아파트를 통하여 온갖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현대인들의
삶을 단면으로 보고 싶었을 뿐, 외관상의 모양새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두부 자르듯 단면을 통하여 발췌해 보는 것이 동기였고 그러한 작업을 통하여
치장하지 않은 본질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접근하고 싶었을 뿐이다. 아침에 눈뜨고 일어나서
기초화장, '화운데이션' 하나도 바르지 않은, 깨끗이 세안한 맑은 얼굴로 말이다.




 

 

 

Misty harbor(안개낀 항구-4)
2012 Digilog Artworks (3442) Image size 8,000 x 5,696 Pixels (130.4M) Resolution 300dpi.

 


모르는 것은 창피한 일이 절대 아니다. 
안개란 단어를 모를 사람이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나는 다시 한 번 백과사전이나 영어사전,
또 우리말사전을 통하여 그 뜻을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뻔한 소리겠지만 확실한 것으로...


백과사전에서 안개는 <지표 부근에 있는 대기 중의 수증기가 응결 또는 빙결하여 작은 물방
울 또는 얼음 알갱이가 형성되어 시정(視程)이 1㎞ 이하인 상태>라고 표기되어 있다 그래,
사전을 잘 찾아보았지 가시한계를 말하는 시정이 1km 이하가 안개를 가름하는 척도인 것은
몰랐으니까. 게다가 특성 부분에 가서 <안개와 구름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는 없으므로 높은
산에 낀 안개는 구름(雲霧)과 구별하기 어렵다. 이것은 평지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구름으로
보이나 산에 있는 사람이 볼 때는 안개로 관측되기 때문이다. 시정이 1㎞ 이상일 때는 박무
(薄霧)라고 한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 나는 앞서의 서술된 시정거리 1km가 넘으면 박무란 것도
몰랐지 않았던가?


이처럼 뻔하게 잘 안다는 것도 다시 한 번 찾아보면 배울 것이 참으로 많은 것이다.
흔히 아는 영어단어의 안개는 fog다. 또는 mist라고도 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 구분하여
사용 하는가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mist보다 더욱 짙은 안개를 fog라고 하고 haze란
표현도 있는데 mist보다 더 옅은 안개, 습기가 적은 안개를 말할 때 쓰인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쓰는 말 미궁을 뜻하는 '미스테리'(mystery)의 어원도 mist에서 나왔음을 살필 수 있다.
아는 것도 물어가라고 혹여 빠트린 것이 있는지 다시 확인하는 습관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사실 근성으로 알고 사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 그다지 불편함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남을
가르치거나 공적인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보다 명확한 지식이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다.




 

 

 

Coffee time-13
2012 Digilog Artworks (3446) Image size 5,000 x 5,000 Pixels (71.5M) Resolution 300dpi.  

 


누군가 날더러 그림쟁이 같지 않고 글쟁이 같은 분위기라고 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신통찮은 작품에도 세세하게 작품 노트를 단상으로 같이 올려주므로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의 시각에서 보았을 때, 문장의 수준과 상관없이 하나의 작품이
영글어지는 과정이 창작이라는 맥락에서 대단히 유사함을 느낀 연유라 보여 진다. 
사실 나는 그림을 그릴 때, 내가 방송국이나 영화 촬영장에 있는 착각을 종종 하곤 한다.
하나의 작품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부분인 '시나리오' 작가여야 한다는 점이 우선 그렇다.
이야기가 없는 그림은 당연히 생명력을 가질 수 없으므로 끊임없이 <기승전결>에 촉각을
세우고 반전에 반전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PD,또는 영화감독으로서의 본분도
대본만큼이나 중요하기에 배우의 '캐스팅'에서 부터 촬영, 음악, 무대미술, 조명, 소품,
의상, 편집에 이르기 까지 눈에 불을 밝히고 버릇처럼 챙기고 또 챙긴다. 여기에 어설픈
인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비정한 결단도 혼자서 한다. 압축하고 또 압축하여
단 한 장의 그림 속에 이야기를 다 넣어야 비로소 영화가 되는 것이다. 
이 그림의 경우, 주연처럼 보이는 커피포트와 커피 잔도 상징적 이미지일 뿐, 결정적인
배역이 아님은 물론이다. 제목에서 시사 하듯이 커피를 마실(또는 마시는) 시간이 주제다.
한 잔의 짙은 커피 향과 함께 피어오르는 온갖 상념들, 그리고 그 애잔함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이지 저까짓 커피포트'가 무슨 관심의 대상이며 가슴에 불을 지피겠는가 말이다.




 

 

 

산화되는 꽃
2012 Digilog Artworks (3440) Image size 5,000 x 5,000 Pixels (71.5M) Resolution 300dpi.  

 


꽃은 왜 우는가?
아니 꽃이 과연 울기라도 하는가? 결론부터 이야기 하자면 분명히 꽃도 운다. 이런 가설은
깊지도 못 한 나의 지식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세계적인 '사이언스' 잡지 Nature에 실린
석학들의 연구결과에 토대를 두었다. 꽃을 포함한 모든 식물들도 나름대로의 고통(Pain)에
민감한 반응을 한다는 것이다. 가령 나뭇가지를 잘라내었을 때, 나무는 몹시 고통을 느끼고
상처부위에 진액을 분출하여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방어적 자세로 전환하지만 그 과정에서
사람의 경우 울음에 해당하는 음파가 발생하고 생체 리듬에 엄청난 변화가 증폭된다.


꽃이라고 그러하지 않겠는가?
추워서 울고, 뜨거워서 울고, 목말라 울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파랑나비가 그리워서도
운다. 파릇한 젊음이 만개하였다가 시들어지고 말라비틀어지면 피 빛 울음을 울고 석양의
하늘을 보며 절규도 한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이다. 안으로 삼키는 울음이 얼마나 많은데
사람들은 소리내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져야 우는 줄 안다. 정작 너무나 큰 슬픔은 울음
조차 나지 않는 것을 알면서도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은 실체가 아닌 양, 그저
무심히 스쳐 지나가기 일쑤다. 아프다는 소리가 안 들리니 사람들은 꽃대를 가위로 삭뚝
잘라내고 아직은 한참이나 더 피어있을 꽃들을 일주일 즐기자고 화병에 꽂아두고 그것이
무슨 고상한 기품인 양 착각하며 속빈 강정 같은 우아를 뜬다.


꽃도 이젠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산화하고 싶다.
花無十日紅이라고 때가 지나도 한참 지났음을 자각한 꽃은 구차하고 초라한 구걸이 싫다.
그리 마음 먹으며 스스로를 산화함으로써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켜내려고 안간 힘을 쓴다.
녹아내리건 산화하여 공기 중에 뿌려지건 이제는 이 모진 아픔과 작별할 시간인 것이다.
떠나야 할 때, 떠날 용기도 없으면 꽃이 아니다.



자료 출처;

오진국 디지털아트...http://blog.ohmynews.com/Digital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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