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군부독재 시절, 민주화의 ‘정신적 지주’
경향신문 | 기사입력 2009.02.17 01:00 | 최종수정 2009.02.17 03:33
ㆍ30년간 서울대교구장… '실천하는 신앙인'
ㆍ2000년 이후엔 보수적인 발언으로 논란도
ㆍ70~80년대 격동기약자들의 편에서그들의 존엄성을지켜주려 했다
"나는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
16일 선종한 김수환(스테파노) 추기경은 자신의 회고록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2004)에서 엄혹했던 군부독재 시절을 이렇게 돌아봤다. 68년 서울대교구장에 임명돼 30년간 재직하면서 국민의 자유와 인권 보장, 민주화에 헌신한 그는 실천하는 신앙인으로 천주교 신자뿐 아니라 한국인 모두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다지고 위상을 높였다. 그는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 교류 활동에도 앞장섰다.
김 추기경은 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내 추기경 집무실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또다른 삶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부 김보현(요한)이 1868년 무진박해 때 감옥에서 순교해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은 옹기장수로 영남 일대를 전전하면서 궁핍한 살림을 꾸렸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김수환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김수환은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41년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東京) 유학길에 올랐지만, 당시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앞서 동성상업학교 졸업반 시절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가 나오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51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라는 성구를 선택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김수환 신부는 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그는 69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는데, 당시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 임명 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김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81년 테레사 수녀의 첫 방한을 성사시켰고,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방한했던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89년) 등 굵직한 행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 치러졌다. 김 추기경이 교구장을 맡은 30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70년대 이후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87년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했다.
그는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장기집권으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성명을 발표, 박 정권과 충돌했다. 이후로도 지학순 주교의 구속(74년)을 시작으로 명동 3·1절 기도회(76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78년)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김 추기경은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당연히 가톨릭과 정권의 대립 양상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명동성당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자리매김됐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마다 정권을 향해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그였지만 엄숙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김 추기경은 2003년 서울대 초청 강연에서 "삶이 뭔가, 너무 골똘히 생각한 나머지 기차를 탔다 이겁니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는데 누가 지나가면서 '삶은 계란, 삶은 계란'이라고 하는 거죠"라고 말해 좌중을 웃겼다. KBS < 열린음악회 > 에 출연해 '애모'를 열창하는가 하면, 코미디언 이경규씨와 만났을 때 "추기경님 정말 인중이 긴 것 보니 오래 사시겠다"는 농담을 듣고도 인자한 웃음을 보였다.
민주화의 중요 고비마다 물꼬를 트는 발언으로 '정의의 사도'로 존경받았던 김 추기경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현실정치 무대의 보수파와 뜻을 같이 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다.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를 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가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교계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이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철저히 실천해온 신앙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
☞ [화보]'큰 별이 지다' 김수환 추기경 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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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2000년 이후엔 보수적인 발언으로 논란도
ㆍ70~80년대 격동기약자들의 편에서그들의 존엄성을지켜주려 했다
"나는 1970~80년대 격동기를 헤쳐 나오는 동안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가난한 사람들, 고통받는 사람들,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이다."
가톨릭 순교자 집안에서 태어나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에 임명된 그는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도 한국 가톨릭의 기틀을 다지고 위상을 높였다. 그는 해외 선교 지원, 북한 동포 돕기 운동과 남북한 교회 교류 활동에도 앞장섰다.
김 추기경은 98년 서울대교구장에서 물러난 뒤 서울 종로구 혜화동 주교관 내 추기경 집무실에서 기도와 묵상으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오래 사는 것'보다 '기쁘게 잘 사는 것'이 더 소중한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러나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또다른 삶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조부 김보현(요한)이 1868년 무진박해 때 감옥에서 순교해 유복자로 태어난 김 추기경의 부친은 옹기장수로 영남 일대를 전전하면서 궁핍한 살림을 꾸렸다. 순교자의 후손답게 깊은 신앙심을 가졌던 김수환은 모친의 권유에 따라 형 동환과 함께 성직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김수환은 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예비과에 진학, 성직자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뎠다. 41년 천주교 대구교구 장학생으로 선발돼 일본 도쿄(東京) 유학길에 올랐지만, 당시 김수환은 성직의 길보다 항일독립투쟁에 더 마음이 끌렸다고 한다.
앞서 동성상업학교 졸업반 시절 '황국신민으로서 소감을 쓰라'는 시험문제가 나오자 "황국신민이 아니어서 소감이 없다"고 썼다가 교장에게 불려가 뺨을 맞기도 했다.
그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51년 사제 서품을 받으면서 "하느님,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시편 51장)라는 성구를 선택했다.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김수환 신부는 66년 마산교구 초대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주교품을 받았다. 김수환 주교가 택한 사목 표어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Pro vobis et Pro multis)였다.
그는 69년에 추기경으로 서임되는데, 당시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6명 가운데 최연소자였다. 김 추기경은 "추기경 임명 통보를 받는 순간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인정 받았다는 사실이 가장 기뻤다"고 회고한 바 있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김 추기경은 한국 교회의 위상을 높이는 데 앞장섰다. 81년 테레사 수녀의 첫 방한을 성사시켰고, 조선교구 150주년 기념 신앙대회(81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처음으로 방한했던 한국 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기념행사(84년), 제44차 서울 세계성체대회(89년) 등 굵직한 행사들이 그의 지휘 아래 치러졌다. 김 추기경이 교구장을 맡은 30년간 서울대교구는 48개 본당, 신자 14만여명에서 197개 본당, 신자 121만여명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서울대교구장에 취임하면서 "교회의 높은 담을 헐고 사회 속에 교회를 심어야 한다"고 말했던 그는 70년대 이후 가난하면서도 봉사하는 교회, 한국의 역사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상을 제시해 교회 안팎의 젊은 지식인과 서민, 노동자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었다. 김 추기경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천주교회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놓고 고민하다가 87년 '도시 빈민 사목위원회'를 교구 자문 기구로 설립했다.
그는 억압받고 가난한 민중들에 대한 관심에 그치지 않고 파행적인 정치 현실에 대한 강경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김 추기경은 71년 성탄 자정미사 강론에서 장기집권으로 치닫는 박정희 정권의 공포정치를 비판했고 이듬해 8월에는 시국성명을 발표, 박 정권과 충돌했다. 이후로도 지학순 주교의 구속(74년)을 시작으로 명동 3·1절 기도회(76년), 전주교구 7·18 기도회(78년) 등으로 사제들이 잇따라 구속되자 김 추기경은 성명서와 강론을 통해 자유언론과 인권, 민주회복을 강조했다.
김 추기경의 정치 참여는 당연히 가톨릭과 정권의 대립 양상을 낳았고, 교회 내부에 교회의 정치 개입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특히 명동성당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의 해방구로 자리매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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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김옥균 주교 금경축 감사 미사 도중 어린이의 입맞춤을 받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 회고록 <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 중에서 |
민주화의 중요 고비마다 물꼬를 트는 발언으로 '정의의 사도'로 존경받았던 김 추기경은 그러나 2000년대 이후 현실정치 무대의 보수파와 뜻을 같이 하는 발언을 잇따라 내놓으면서 우려 섞인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김 추기경은 인권침해의 대명사인 국가보안법 폐지에 대해 시기상조란 의사를 밝혔다. 2004년 당시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다. 2005년 사학법 정국에서도 사학법 개정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을 두둔했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정국 때는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다.
이를 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고문인 함세웅 신부가 "김 추기경이 시대의 징표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고 직격탄을 날리는 등 교계 내에서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다.
고인의 삶과 신앙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약간씩 이견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서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 표어를 철저히 실천해온 신앙인이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 김석종 선임기자 sjkim@kyunghyang.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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