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렌트 전원주씨가 살아온 감동글.
방송국에 연예인만 1600여명이 있고, 그 중의 대다수가 무명이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이려고 왔다갔다 한다.
무슨 일이든지 "많이 뛰고 만나서 얼굴도장 찍는 것"이 기본이다.
5학년때 부터였는데 그 때 제일 많이 한 일이 물지게를 지고 식수를 길어나르는 일이었다.
인천에 살 때였는데 그 곳은 짠물이 많이 나서 식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밥도 짓고 무지무지하게 힘든 나날이었는데, 그 때 우리 어머니가 우리를 강하게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오늘의 나는 없었을 것이다.역시 교육이 중요한 것이다.
그 땐 울면 더 맞았고 만약 변명이라도 할라치면 그 날은 완전히 죽는 날이었다.
여러분도 자녀를 키울때 강하게 키워야 한다. 성인이 되어서 나약하고,
자신의 실수등에 대해 변명하는 사람은 절대 출세를 못한다.
우리도 잡초처럼 살아야 하고 자녀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
그러던 끝에 돈을 모아서 서울로 이사를 하게 되었고,이사하는 전날 밤에
짐 보따리를 전부싼 상태에서 "원주야~" 하고 나를 부르시는 것이었다.
안방으로 건너가니 어머니께서는 내 손을 따뜻하게 꼭 잡고 "큰 딸, 그동안 고생 많이 했다.
그 때서야 나는 어머니의 사랑과 위대함을 알게 되었다.
손님이 오면 뭐라도 먹였다. 떡이든 쥬스든...
언젠가 내가 물어보았다.엄마는 어째 그렇게 장사를 잘 하우?
어머니 말씀은 다음과 같았다."딴 거 없다. 손님 가슴에 거울을 대고 비쳐보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손님이 뭘 원하는지, 어느 정도가 어떤 일에 필요한지,
즉 손님의 가려운 곳을 알고 조금만 긁어주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냥 그 물건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 정도로 장사 수완이 있었으며,
나는 그것을 "찬스"에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항상 무엇이든간에 대접을 하면 반드시 효과적이라고 생각한다.
부부도 성격이 맞아야 뭐라도 잘 되는 것 같다.
어머니 같으면 손님이 최종 결정을 말하기 전에 이미 분위기를 주도해서 옷감을 부욱 자르고 있었을텐데, 아버지는 손님이 최종 결정을 하기 전까지는 꼼짝않고 가위만 들고 서있는 그런 유형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가 끝난 후에 물건을 다시 정리해서 가지런히 재진열하고,
회계 정리를 하고 하는 일에는 특출하셨다.
두 분이 고스톱을 칠때면, 어머니는 이미 이것 저것 따와서 점수가 나 버렸는데,
아버지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따와서 무릎 앞에 깔아놓았던 오끗짜리나 열끗짜리 몇장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각을 가지런히 잡고 있는 그런 스타일이었다.
주인 마님만 강부자, 여운계, 사미자 등으로 수도 없이 바뀌어도 나는 영원한 가정부였다.
계속 그런 이미지만 갖고 산다"고 느꼈다.
그러면서 학생들을 한 명씩 뺨을 때리는데, 옆에 섰던 나도 학생인 줄 알고(키가 작으니)
뺨을 가차없이 때리는 것이었다.
뭘 할까 하다가 바로 그 당시 동아방송에서 공모했던 성우 모집에 응했다.
하느님은 정말로 공평하셔서,나는 목소리 하나는 타고 났었다.
프로그램을 맡아서 방송을 하는데 목소리가 너무 고와서 꽤 인기였다.
내 목소리만 듣다가 얼굴 한 번 보겠다고 방송국에 와서 내 얼굴 보고 졸도한 남자 여럿 있었다.
운전하다 1분 안에 세 번 차선을 바꾸는 사람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말도 있듯이
탤런트는 굳건한 의지를 가져야 산다.
대사를 다 외우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고, 잊어먹지 않도록 암기 연습도 죽도록 하고,
연습 시간을 확보하려면 시간 관리에 철저해야 한다.
우리는 녹화에 3번 지각하면 쫓겨나고, 같은 장면 NG 세번 내면 다음부터는 안 써준다.
통상적으로 남자가 더 떨었던 것 같다.
밥을 씹으면서 연기하면 대사를 까먹을까봐 씹지도 않고 얘기하다 밥알이 다 튀기도 하고...
내가 무당 역을 맡을 일이 있었는데 그 때의 대사 중에 "귀신" 이름을 7 가지 외우는 것이있었다.
일주일 내내 연습했는데 연기 도중에 예상치 않았던 꽹가리 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바람에
그만 까먹고 말았다.그 때부터 연출자들 사이에는 "전원주는 새대가리"라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소문은 진짜 무서운 것이다. 한 명이 무려 30명에게 전파를 하더라.
그 때부터 전원주 = 가정부, 김성환 = 도둑(운 좋으면 포졸) 으로이미지가 굳어버렸다.
"7"이라는 숫자 때문에 고생한 우리들이었다.
게다가 애까지 업은 채로 밥상을 나르는 역이 있는 날이면 정말 중노동이었다.
그러고도 집에 오면 그 장면 하나라도 보려고 TV 를 켜면 안 나올때가 부지기수였다. 편집된 것이다.
우리들은 방송에서 편집되면 그나마 한 푼 출연료조차 없는 시절이었다.
그 때문에 결혼해서 애를 다 키우면서까지도 나는 우리 어머니께 얻어맞고는 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TV 에 안 나오거나 나와도 가정부에다,
그러나 나는 돈 한 푼 없었어도 매일같이 방송국에 출근했다.얼굴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김성환씨하고 함께 방송국에 들르는 날이면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며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저기 봐. 식모하고 도둑놈하고 또 왔네"하고...
아들놈이 국민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아들놈이 보고 싶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학교에 갔는데,
그 때 아들 녀석이 한 말, "엄마는 뭐하러 학교에 와 가지고 망신을 시키고그래... "
나는 묻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애들이 나를 보고 "식모 왔다"라고 놀렸을 게 분명했다.
그 때 나는 정말로 탤런트 생활을 때려 치울까 밤을 새서 고민했었다.
둘째. 날씨의 원칙이다. 비바람, 폭우가 몰아치는 날이 있어도 어느 날 분명히 해는 뜬다.
희망과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말고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고, 오기를 갖고 인내하라
한참을 오르다보면 힘도 들고 땀도 난다. 그 때 이 정도만 하고 그만할까 하는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 사람은 정상의 맛을 영원히 못 본다. 끝까지 올라가면 모든 것이 발 아래 있는 법이다.
나는 그렇게 연예계 생활에서 그 오랜 세월을 빛 한 번 못보고 구박만 받고 지내다보니
항상 우울하고 사람들과 말도 않고 혼자서 "중얼 중얼..."대는 습관이 생겼다. 그래서 별명이 "쭝얼이"였다.
먹고 살기도 힘들어서 시장을 봐도 미아리시장 밤 8시 정도 시장이 파장할때 가곤 했다.
그 때 가면 팔다 남은 야채 등을 헐값에 살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날 밤이었다.시장 어디에선가 장사하고 번 돈을 세는 아주머니 한 명이
시장이 떠나갈 듯 유쾌한 웃음을 웃어대는 것이었다. 그 웃음을 듣는 순간
'그래 웃고 살자' 이렇게 굳게 결심했다.
아들이 "엄마 왜 그래, 웃지 마, 귀신 나올 것 같아." 할 정도로 미친 듯이 웃어 제꼈던 것 같다.
"그래, 연출자들한테 약이나 올려주자". 연출자 대기실에 연출자들이 20명 정도 모일때를 기다려,
나는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가서 갑작스럽게 "와하하하~" 하고 사무실이 떠나가라 웃어주고는
우리 어머니는 아까도 말했듯이 모든 것을 다 책임져내신 분이셨는데,
막상 본인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하셨다.
수금하러 갔다가 언쟁중에 쓰러지셔서 중풍을 맞고 13년 8개월을 병석에 누워계시다가
당뇨실명까지 와서 별세하셨다.
어머니 상을 치를때 김인문씨(극중 내 남편역)가 와서 마치 사위처럼 모든 일을 다 치루어 주었다.
사람들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바뀐 줄 착각할 정도였다.
아울러 사람들과 더불어 살고 돕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20년을 참고 뜬 태양은 지지도 않더라. 여러분도 인내하고 밀어붙이고 노력하면 성공한다.
지금 난 일년치 스케줄이 새카맣다.
살면서 근면하고, 절약하고, 원칙을 세우고, 남편과 자식들한테 잘해주고.. 해야 할 것이 많다
여러분도 오로지 내일을 향해 뛰기 바란다
'***가보고 싶은곳*** > 주요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래 첨부 동영상은 지난 19~20일 용산사태 동영상이다] (0) | 2009.01.30 |
---|---|
중국인이 말하는 서울 면동 (0) | 2009.01.07 |
[포토엔]유재석, 대상 강호동과 축하의 포옹 (0) | 2008.12.28 |
강변역사고 (0) | 2008.12.20 |
최진실호통 (0) | 2008.11.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