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로가려던나무: 이생진 시인
나무가 겁없이 자란다.
겁없이 자라서 하늘로 가겠다한다.
하지만 하늘에 가서 무얼한다
갑자기 허탈해진다.
일요일도 없는
하늘에 가서 무얼한다
나무는
그지점에서 방황하기 시작한다.
고백 : 이생진 시인
이젠 잊읍시다
당신은 당신을 잊고
나는 나를 잊읍시다
당신은 내게 너무 많아서 탈
당신은 당신을 적게 하고
나는 나를 적게 합시다
당신은 너무 내게로 와서 탈
내가 너무 당신에게로 가서 탈
나는 나를 잊고
당신은 당신을 잊읍시다
유혹 : 이생진 시인
神은 날 직선으로 유혹했지만
나는 항상 곡선으로 달아났다
圓으로 둘러주는 사슬을
가슴으로 풀며
조금씩 생기는 자유는
혼자 쓰기도 모자라서
기다리며 살아왔다
고독 : 이생진 시인
나는 떼 놓을 수 없는 고독과 함께
배에서 내리자마자
방파제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해삼 한 토막에
소주 두 잔
이 죽일 놈의 고독은 취하지 않고
나만 등대 밑에서 코를 골았다.
이해 : 이생진 시인
성산포에서는
살림을 바다가 맡아서 한다
교육도
종교도
판단도
이해도
성산포에서는
바다의 횡포를 막는일
그것으로 둑이 닳는다
섬마당의 아이들 : 이생진 시인
바다가 앞뒤로 들어찬 섬마당에서
아이들은 즐겁다
복잡한 내일이 보이지 않아 오늘이 즐겁다
소나무는 크면서 물 건너 미래가 보이는데
아이들은 고개를 들어도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십 년 후엔 노인만 남을 것 같고
오십 년 후엔 소나무만 남을 것 같은 마을
지금 아이들에겐 그것이 보이지 않아 즐겁다
외로울 때 : 이생진
이 세상 모두 섬인 것을
천만이 모여 살아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욕심에서
질투에서
시기에서
폭력에서
멀어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떠있는 섬
이럴 때 천만이 모여 살아도
천만이 모두 혼자인 것을
어찌 물에 뜬 솔밭만이 섬이냐
나도 외로우면 섬인 것을
취한 사람 : 이생진 시인
취한 사람은
사랑이 보이는 사람
술에 취하건
사랑에 취하건
취한 사람은
제 세상이 보이는 사람
입으로는 이 세상
다 버렸다고 하면서도
눈으로는 이 세상
다 움켜쥔 사람
깨어나지 말아야지
술에 취한 사람은 술에서
사랑에 취한 사람은 사랑에서
깨어나지 말아야지
화장하는 여인 : 이생진 시인
바다 앞에서
거울을 보며
눈썹을 그리는 여인
바다가 뭐라고 하는 것 같아서
빙그레 웃었다
다시 나만 남았다 : 이생진 詩人
다시 나만 남았다
영혼을 쫓아다니느라 땀이 흘렀다
영혼을 쫓아다니는데 옷이 찢겼다
자꾸 외로워지는 산길
염소쯤이야 하고 쫓아갔는데
염소가 간 길은 없어지고 나만 남았다 곳곳에 나만 남았다
허수아비가 된 나도 있었고
돌무덤이 된 나도 있었고
나무뿌리로 박힌 나도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불쌍해서 울었다
내가 많아도 나는 외로웠다
검은 抒情 - 변시지의 제주풍화집에서- : 이수익 시인
제주
바닷가에는
까마귀떼만 자욱하다.
耳鳴같은 파도소리에 묻히는
까마귀떼 울음소리만 자욱하다.
해 뜨기 前,
예감의 시간에 바닷가로 나온
검은 점술의 巫女들이 부르는
降神의 휘파람 소리,
휘파람 소리만 자욱하다.
솟구치는 파도의 이랑보다 더 깊은
저 生者와 죽은 이의 靈界를 넘나들며
슬픈 혼백들을 달래는.....
새와 나무 : 류시화 시인
여기 바람 한 점 없는 산속에서면
나무들은 움직임 없이 고요한데
어떤 나뭇가지 하나만 흔들린다
그것은 새가 그 위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별일없이 살아가는 뭇사람들 속에서
오직 나만 홀로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날아와 앉았기 때문이다
새는 그 나뭇가지에 집을 짓고
나무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지만
나만 홀로 끝없이 흔들리는 것은
당신이 내 안에 집을 짓지 않은 까닭이다
길 떠나는 친구에게 ; 박우현 詩人
친구여
빛나는 너의 어깨 위에
사랑의 향기 그득하구나
긴 항해를 마치고
항구에 선 너를 축복하듯
부둣가엔 환영 인파 그득하고
믿음으로 일궈낸 너의 사랑의 이랑과
진실로 짠 나지막한 맹세는
너무나 당당하구나
언젠가
망망한 바다의 복판에서 말했었지
고독한 항해를 맺고 싶다고...
거대한 파도를 넘고
빙하의 바람꽃 바다에
미끄러지듯
사랑의 돛을 달아
이제
포근한 항구에 네 생의 닻을 내린
친구여
언제나 넉넉한 맘으로
네 맘 선장의 명에 따라 그렇게
살아가려무나
친구여.
조랑말 : 黃順元
말아
제주돗 말아
어쩌면 네 눈이 내 눈 같고
네 갈퀴가 내 머리카락 같냐
말아
흰 이빨 드러내고
우는 말아
너도 아마
긴긴 하루 해가
그리 서러운가 보다
우리 함께
서귀포에
목을 안고 서면
이대로 살고 싶은
물길 천리
혼자 남았을 때 : 이생진 詩人
다 떠나고 혼자 남았을 때
사람이기보다 흙이었으면
돌이었으면
먹고 버린 귤껍대기였으면
풀되는 것만도 황송해서
오늘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돌틈에 낀 풀을 잡고 애원하는 꼴이
풀뿌리만도 못한 힘줄로
더듬더듬 밧줄을 찾았지만
고독엔 밧줄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