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3월, 지수보통학교를 졸업한 구인회는 더 넓은 세상에서 견문도 넓히고 배워야 한다는 결심을 가졌다. 하지만 장손이자 결혼을 하여 집안을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는 점, 그리고 만만하지 않은 서울 유학 경비 등으로 깊은 고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구인회의 고향 지수면의 2021년 현재 풍경./더페이퍼/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장인 별세·장남 책임감에 중퇴 후 귀향# 대가족 집안의 장손약 10여년에 걸쳐 구인회 집안은 동생과 자녀들로 대가족을 이루었다. 숙부의 옷을 조카에게, 조카의 옷을 나이 어린 숙부에게 내림으로 입혔다. 한 이불 아래서 숙부와 조카가 발싸움을 하며 이불을 차지하거나, 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여럿이 식사를 하면서 성장하였다. 고기 반찬이 상위에 올라오면 어린 나이의 숙부와 나이 많은 조카가 서로 먹으려고 밀치고 다투기도 하였지만 가족간의 우애는 늘 다정하였다.# 고향에서 협동조합 설립과 운영수년 전부터 지수면 승산리에는 일본인이 연필, 성냥, 양초 등 잡화점 가게를 운영하였다. 지수보통학교가 개교하자 문구와 생필품 외 석유까지 판매하는 종합 잡화상으로서 독점적 위치를 활용, 물건값을 갈수록 비싸게 판매하였다. 승산리 주민들은 이곳 가게 외 물건을 구입할 곳이 없어 비싸도 구입해야 하는 처지였다.구인회는 진주와 마산을 오가면서 석유, 일용잡화 등을 구입하여 판매하였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가게보다 값도 싸고 품목도 다양해지자 마을 주민들의 이용도 늘어나면서 협동조합은 점점 번창하였다. 광목이나 비단 등 품목도 나날이 다양해져 갔다. 구인회는 약 3년간 협동조합을 운영하면서 물건 고르는 법, 도소매 유통과정 등 장사하는 안목도 가지게 되었다.#조선사람 조선 것으로, 물산장려운동군산에서 경성고무공업사를 운영하던 이만수 사장이 짚신을 모델로 하여 생산한 ‘만월표 검정고무신’은 당시 서민들의 나들이에 혁명이라 할 정도로 일상생활의 변화를 준 대표적인 우리 상품이었다.# 동아일보 진주지국 승산분국장당시 지수면의 지리적 환경으로 볼 때 국내외 정세를 가장 빠르고 폭넓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신문이었다. 한글을 깨우친 사람들에게 세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동아일보 지국장으로 매일 접하는 신문을 통해 나라의 일과 멀리 외국에서 발생하는 일도 알게 된 구인회의 가슴속에는 더 넓은 세상에서 큰 일을 해야 한다는 야망이 꿈틀거렸다. 이때부터 ‘지수 탈출’이라는 갈등의 씨앗이 자라기 시작하였다.동네 청년들 몇몇은 작은 지수면을 뒤로하고 큰 도시로 일자리를 찾아 떠나갔다. 구인회 역시 물건을 사기 위해 부산, 마산, 진주, 서울 등 대도시에 규모가 큰 도매상과 거래를 하면서 보고 배운 것도 많았다.4남매의 아버지이자 다섯 형제의 장남으로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서는 경제력이 필요하였다. “지수는 좁고 작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돈을 벌어야 한다. 농사로는 도저히 안된다.” 구인회는 마침내 결심을 하였다. “장사를 하자. 큰 도시로 나가자.” -
구인회는 1931년 3월 30일 동아일보 진주지국 승산분국장에 임명되었다./이래호/ - 구인회가 고향에서 활동하던 시기에는 일본기업과 일본 상인이 조선에 진출하면서 우리 산업과 상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때, 우리 물산을 사용하여 민족산업을 보호하고 경제적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장려운동’이 전개되었다. ‘조선물산장려회’등의 단체는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사람 조선 것으로’라는 구호를 만들고 일본상품 배격, 우리상품 이용을 독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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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수면 승산리에는 일본인이 연필, 성냥, 양초 등 잡화점 가게를 운영했다. - ‘협동조합’은 물건값도 값싸게 하고, 또 이익이 생기면 조합원들이 이익 분배도 할 수 있으니 마을주민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업이었다. 구인회의 사업 취지에 공감한 마을 청년들과 주민의 지지로 1926년 3월 승산리 마을 협동조합을 결성하고 구인회를 대표자로 선출하였다.
- 1926년,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청년 구인회는 고향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 끝에 청소년 시절 지수에서 ‘장근회’ 활동을 하면서 쌓은 경험을 살려 보기로 한다. 마을 사람들이 힘을 합해 공동으로 일을 추진하면 잘 될 것이라 생각하고 주민들을 모아 ‘지수협동조합’을 구성하고 잡화상을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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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인회가 고향으로 돌아와 지수면에 세운 ‘지수 협동조합’(사진 위, 현 지수면사무소 맞은편)과 당시 지수면 상권을 독점한 일본인 무라카미의 ‘종합 잡화점’(사진 아래, 현 부자마을 안내소 건너)./이래호/ - 구인회는 밑으로 동생 구철회, 구정회가 줄줄이 태어났고 1922년에 장녀, 1925년 장남 구자경이 태어났다. 1923년에 셋째 동생 구태회, 1926년에는 넷째 동생 구평회가 태어났다. 아들 구자경이가 작은 아버지 구평회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어 1928년에는 둘째 아들 구자승과 다섯째 동생 구두회가 한달 사이로 태어났다.
- 1926년 주민들과 힘 합쳐 협동조합 결성
대표로 도시 오가며 잡화 등 구입·판매
3년간 물건 고르는 법 등 장사 안목 키워 - 1926년 봄, 구인회는 고향에 계신 장인의 별세 소식을 접한다. 처가에서 도와주던 서울 유학비의 지원이 더 이상 어려울 것이라 판단을 가졌다. 할아버지도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오라는 당부도 하였다. 중앙고등보통학교 5년의 학제를 다 마치기에는 3년이나 더 다녀야 하기에 구인회는 학비와 장손으로서의 책임 때문에 중퇴를 결심하게 된다.
- 천리길이나 되는 서울에서의 생활은 부모님과 부인에 대한 생각, 큰딸 양세, 큰아들 자경 그리고 동생들에 대한 장남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여러 가지 복잡한 심정이 끊이지 않았다.
- 구인회는 지금의 중·고교 과정인 5년제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을 하였다.
- 그런데 비교적 일찍 신식문화를 받아들인 처가에서 사위 구인회에게 학비를 보내줄 테니 서울에서 더 공부를 하라고 권유하였다.
진주시와 지수초에 따르면 LG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과 삼성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한때 이곳에서 함께 공부했다. 구 회장은 승산마을이 고향이고 이 회장은 승산마을 인근 의령군이 고향이다. 지수초에는 두 사람이 개교 때인 1921년 함께 심은 것으로 알려진 ‘부자소나무’도 있다. 산골의 작은 초등학교를 빛낸 재계 인물은 이들뿐만 아니다.
[오늘 딸이 지수에 같이 가 보자고 해서 따라 갔더니 구인해 회장의 고향이었다
어릴때 다니던 햑교도 가보고 생가도 가보았다.
이명철회장과 구인회 회장이 함께 다니던 3학년 2반 교실을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