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기 나름 (見解 차이)>
시체를 먹는 풍습 (청담 스님의 글)
세계를 일주한 사람으로 부터 들은 이야기입니다.
어떤 나라에 갔는데, 시체 앞에서 한 사람이 칼을 들고서
시체(屍體)를 한 점씩 주위 사람들에게 주고
그들은 받아먹고 있었다.
그래서 죽은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자기의 부친(父親)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 죽은 아버지의 시체를 먹느냐고 물으니,
그러면 너희 나라에서는 어떻게 하느냐고 반문(反問)을
하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양지(陽地) 바른 곳에 파묻는다고
말을 하니,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이, 왜 너희는
자기 아버지를 구더기나 벌레가 먹도록 하느냐?
우리는 아버지가 소중하기에, 아버지를 벌레가 먹지를
못하도록 우리가 먹는다고 했다.
그것도 장남은 가장 많이 먹고, 둘째. 셋째의 차례대로
할당된다고 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常識)으로는 참으로 묘한 일이지만 그것은
그들만의 관습(慣習)이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에 달렸다.
莊子와 제자(弟子)들의 대화
장자의 죽음에 임하여 제자(弟子)들이 장사(葬事)를 후하게
치르려고 계획했으나 장자는 만류하였다.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한 쌍의 구슬로 삼고,
별들을 구슬장식으로 하며, 만물을 부자라 생각한다면
내 장례식(葬禮式)에 부족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그렇지만 아무렇게 장사를 지내면 까마귀와 솔개가
사부(師父)님의 유해(遺骸)를 먹을까 걱정입니다.
“물론 땅위에 있으면 까마귀와 솔개의 밥이 되겠지.
그러나 땅 밑에 있으면 땅강아지나 개미의 밥이 되지
않겠느냐?
결국 까마귀와 솔개가 먹을 것을 땅강아지나 개미에게
준다고 해서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죽음에 대한 莊子의 생각:(哭대신 노래를 부르다)
장자의 부인(婦人)이 죽었을 때, 친구인 惠子가 문상(問喪)을
와 보니, 장자는 빗대어 기대앉아 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기에 惠子가 말하기를:
자네는 부인과 함께 동고동락(同苦同樂)하면서 자식을 낳아
같이 길렀는데, 울지 않는 것까지는 이해하지만 어찌 분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부른단 말인가, 좀 심하지 않은가?”하고
나무랐다.
이에 장자가 대답하기를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는가? 그러나 잘 생각해 보게나
인간(人間)이란 애당초 생명(生命)을 가지고 있지 않았네.
생명은 고사하고 형체(形體)도 없었고, 기운(氣運)조차 없었네.
그저 망막하고 혼돈(混沌)한 대도(大道)속에 섞여 있던 것이
변해서 기운을 낳고, 기운(氣運)이 변해서 형체(形體)가 생기고,
형체가 변해서 생명(生命)이 되었네.
그리고 그것이 변해서 다시 죽어서 간 것일 뿐이네.
다시 말해 삶과 죽음이란 사계절(四季節)의 순환(循環)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모처럼 하늘과 땅을 침실(寢室) 삼아 편안히 잠들어 있는
참된 모습 옆에서 소리 내어 운다는 것은, 천명(天命)을
분간하지 못하는 천박(淺薄)한 짓으로 생각되었기에 우는 것을
그만 둔 것일세.
이에 惠子는 입을 다물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장자(莊子)는 기본적으로 삶과 죽음은 연결된 순환(循環)으로
본다는 것이다.
생(生)과 사(死)는 기(氣)의 모임과 분산(分散)의 차이 일뿐
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죽음에 임하여 너무 슬퍼하지 말며,
삶에 대하여도 지나치게 집착(執着)하지 말라.
장자 철학(哲學)에서는 삶과 죽음의 화해(和解)가 이루어진다.
공자와 자공(子貢)의 대화
공자(孔子)의 제자 自貢이 외출했다가 귀가 길에, 돼지를 잡고,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흥겹게 잔치를 하고 있어, 자기도
어울려서 한참을 놀다가 무슨 잔치냐고 물은 즉,
아버지가 돌아가셔 잔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자공(子貢)은 먹은 것이 다 넘어 올 듯하고, 속이 상해서
욕을 한바탕하고는 돌아와서 공자께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말씀드렸더니,
공자는 오히려 “吾不及也니라. 즉, 나는 그에 미치지 못한다.
그 사람은 달관(達觀)한 사람이고 초월(超越)한 사람이다.
높은데서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서울은 인천에서 보면 동쪽에 있고, 원주에서 보면 서쪽에
있으며, 부산에서 보면 북쪽에 있고, 평양에서 보면 남쪽에 있다.
그러나 우주(宇宙)에서 보면 서울. 인천. 원주. 부산. 평양은
동일한 위치(位置)에 있다.
어떤 것을 기준(基準)으로 판단하는가에 따라서 달라진다.
그런 면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에 대한 견해는 전적(全的)으로
옳은 것도 없고, 전적으로 틀린 것도 없다.
어떤 색의 안경(眼鏡)을 쓰고서 보는가에 따라서 다르고,
어떤 각도와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서 또한 다르다.
전적으로 자기의 생각과 관점(觀點)에서만 판단하고 주장하는
우(愚)를 범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그래서 의학의 아버지 Hippocrates는
“판단(Judgement is difficult)은 어려운 것” 이라고 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