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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기명기***/그때그시절에

미국이 보관중인 조선시대사진에의 초대

*설향* 2011. 4. 8. 16:10

미국이 보관중인 조선시대사진에의 초대

※아래 표시하기 클릭 하십시요?.


-- Welcome to Chosun Era --

◈§ 미국이 보관중인 조선시대사진에의 초대 §◈


▲ 1880년대 당시의 남대문

 


▲ 1880년대의 남대문 중앙로
조선시대의 길거리를 가운데 두고  늘어선 초가집


▲ "Namdaemun"(Great South Gate in Seoul) Date: 1904 
 Collection: Willard Dickerman Straight and
Early U.S.-Korea Diplomatic Relations,

Cornell University Library

Willard Dickerman Straight


 
▲ 1931년 박흥식(朴興植)이 서울 종로(鍾路)

2가에 세운 "화신 백화점"
당시 한국의 랜드마크적인 존재로 일세를 풍미했다.

화신백화점은 1987년에 문을 닫았고
1988년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되어
1999년 그 자리에는 미국 건축가 설계로

 "삼성 종로타워"가 들어섰다.



▲ 1935년 서울 남대문
왼족의 상업은행과 오른쪽 중앙 "레토크림"

(レ-トクレ-ム) 화장품 세로 광고탑
오른쪽 "기린맥주"(キリンビ-ル) 가로 광고



▲ 평양에서 영업중인 왕복 노면전차  -운임 5전-


 
▲ 1942년 흥남공업 도시
조선 질소비료공장 . 일본 마그네슘 . 조선광업 등


 
▲ 수풍 댐 수력 발전소
일제 강점기인 1937년에 만주국과 조선의

전력확보를 위해 건설이 개시되었다.
건설된 것은 압록강하류의 평안북도 신의주로

부터 80 km지점의 한만국경(현재는 중.북 국경).

담수면적은 일본 비와코의 거의 반에 상당해

총공비는 약 5억엔이다.
(이 금액은 동경에서 시모노세끼를 잇는

신칸센 건설 규모에 필적하는 금액이었다)

그 비용은 당시 한반도에서도 일대 중화학

기업인 조선질소비료 (현재의 질소/日チッソ-칫소)

가 부담했다.
태평양전쟁이 한참인 1944년 3월에 수풍수력

 발전소(발전 능력 60만 kW)와 함께 준공했다.

이 발전 규모는 당시의 세계 최대급이며
1940년 당시의 일본내의 수력 발전 규모가

280만 kW와 비교해도 그 크기는 용이하게

 비교할 수 있다.

7기의 발전기는 각각 약 10만 kW의 발전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것은 당시 세계 최대급의 능력이며
설비제조를 수주한 회사는 동경시바우라

 전기(현재의 토시바)에서 제조를 맡았으며
시공업자는 일본 하자마구미와 니시마쯔

건설(間組, 西松建設)이 했다.

Hazama Corporation and Nishimatsu Construction Co., Ltd.

 

▲ 한국전쟁 당시인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침공하여 총 7기의 발전기중

5기를 약탈해 갔다.

약탈된 발전기는 카자흐스탄 공화국,

이리티슈 카와카미류의

 댐에서 확인되었다.

한국 전쟁중에 뇌격을 포함한
미군기의 공격을 받았지만 댐 구조가 워낙

 견고했었기 때문에 파괴를 면했다.

전후에 북한은
발전 능력을 증강해 이 댐 덕에 부흥했다.

준공으로부터 60년 이상 경과한 현재도
댐 본체는 큰 개수 공사를 하지 않고

현역으로 활동 중에 있다.

사족(蛇足) :
북한의 국장에는 이 댐을 디자인한

도안으로 되어 있으며
또 2009년 북한 중안은행발행 5원권 지폐

뒷면에 수풍댐의 사진이 그려져 있다.


 
▲ 1940년 당시 조선을 대표하는 호텔 "조선호텔"

 선룸무도가 崔承喜의 모습


 
▲ 당시 번화가 명동의 모습
오른쪽 모자쓴 남성뒤로 "빅터 SP 레코드

""(Victor) 세로 간판이 보인다.
그리고 간판 위쪽에는 레코드 판 광고판이

걸려 있다.


< 누가 고종황제를 죽였는가? >





 

▲ 대한제국 황궁인 덕수궁 석조전에서 촬영한

황실가족 사진.
왼쪽부터 영친왕, 순종, 고종황제, 순정효황후, 덕혜옹주


 

▲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1912∼1989)

 

▲ 1897년10월12일 고종의 황제 즉위를 축하하는

 덕수궁 대한문(대안문) 앞은 

백성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 고종황제의 장례행렬 
1919년 1월21일 덕수궁 함녕전에서

고종황제가 승하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은

전국으로 퍼져 3.1운동의 기폭제가 된다.

KBS 1TV '역사스페셜'은 15일 오후 8시

광복절 특집 '고종황제,
그 죽음의 진실'을 통해 고종황제 독살설의

진실을 파헤친다.

최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에 의해

고종 독살에 관한 새로운 자료가 제시되었다.
그가 찾은 것은 당시 일본 궁내성 관리

구라토미의 일기.
거기에는 고종황제의 죽음이 일본의

지시에 의한 독살이었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다.

기록에 의하면 고종의 시신 상태는 처참했다.
팔다리가 심하게 부어올라 바지를 찢어야만 했고,
이가 빠져 있고 혀가 닳아져 있었다.
또한, 30㎝가량의 검은 줄이 목에서 복부까지

나 있었다.

제작진은 "고종이 마지막으로 먹은 음식은

식혜로 알려져 왔는데,
고종은 정말 식혜를 마시고 죽은 것일까"

라며 "현대 법의학을 통해
고종황제의 구체적 사인을 추적한다"고 밝혔다.

1919년은 한일강제병합이 일어난 지 10년 뒤이고,
고종도 이미 퇴위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고종 독살설이 강력하게 떠오른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구라토미의 일기는 일본이 고종황제가

해외에 독립을 호소하려는 것을
미리 알고 막으려다 여의치 않자 독살을

감행하였음을 암시하고 있다.
또한, 고종은 이회영을 통해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진행하고 있었다.

 
▲ 1919년 19살의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와 진왕자가 탄생했을 때의 영친왕 부부.



 
▲ 덕수궁 석조전에서 영친왕(가운데)의 모습



 
▲ 영친왕비 이방자(1901~1989) 여사의 일본친정 가족 사진
Archive :
한일 친선에 생애를 바친 일본

황족 출신 이방자(李方子) 여사


 

- 대담했던 한국 아낙네들 -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문명사회에 있으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원시적

이었던 조선시대 아낙네들의 대담한 모습






























 

▲ 러일전쟁 무럽 프랑스 신문에 실린 한국 여성의

 "젖가슴 드러낸 치마 저고리" 풍자화

본문 일본어 내용
 - 조선을 둘러 싼 러일간의 대립 -
"조선중립"(조선 여성의 손을 주목)이라고 쓰인,
이미 깨져버려 못 쓰게 된 단지를 든 조선에

위로 말을 붙이는 일본.
 

 "그러나 가엾다. 만약 내가 침략해 오지 않았

더라면, 대신 침략한 것은 저 털보

소련놈들이었을 테니...!"   









▲ 18세기 이후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이 무렵부터
"장남을 낳은 여성은 젖가슴을 노출한다."라는
이상한 습관이 생기게 되었다.

아직 남존여비의 사상이 뿌리깊은
이 시대에 "장남을 낳지 못하면 여성의

가치가 없다."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또 이 의상은 여성에게 있어서 "남아를

출산하여 사회적인 책임을 다했다."라는

상징적인 자랑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 습관은
일본 순사에게 뺨까지 맞아 가면서도

굳건히 지켜지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한 뒤인 1950년대까지도 이어졌었다.

아래의 사진은 프랑스 판화 화가

Paul Jacoulet(1896-1960)의 작품

그녀는 3살 때에 부모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한국, 중국, 폴리네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애를 일본에서 보내며
많은 작품을 남겼다.






▲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서민의 기묘한 습속

인물화를 섬세한 선과 파스칼 컬러로

여성답게 표현했다
 

▲ - 시골의 결혼 피로연과 톱레스 치마

저고리 아낙네들의 분주한 움직임 - 1921년





▲ - 아침의 잡담 - 1921년




▲ - 톱레스 치마 저고리 - 조선 서민의 기묘한 습속

당시 조선시대의
"톱레스 치마 저고리"는 1911년 한일합방이

 되고서도 이런 풍습은 남아 있었다.

일본 통치하에서는 풍속문란이라고

하여 일본 순사로부터 길거리에서 뺨 맞아

가면서도
그렇게 쉽사리 없어질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 바티칸 교황청 한국 대사관에  기증된

"한국판 마리아 상"

2005년 바티칸의 교황청 주재 한국대사관에

 안치된 한국형 성모마리아상.

성염 주 교황청 한국대사의 의뢰로
돌조각가 오채현씨가 약 10개월간 걸쳐

만든 약 2m 높이의 이 작품은
한복을 입은 한국의 평범한 어머니가

등에 발가벗은 아기 예수를 업고
머리에는 물동이를 지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물동이는 천주교회에서 쓰이는

성수(聖水)를 나타낸다.

역시 압권이라면 성모 마리아가 가슴을

전부 대담히 드러낸 모습이 한국적이다.


 
▲ 당시 양반계급의 여성이 외출 때의 모습


장날
 
▲ 노점상, 비녀를 비롯하여 면빗, 얼레빗, 참빗들이




▲ 엿장수 소년이 커다란 엿목판을 걸치고 있다.


 
▲ 꽈배기 장수의 청년과 소년


 
▲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의 붕괴사고 장면 
원인은 영추문 바로 옆을 종점으로 하여 운행된

 전차의 진동 때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 독뚜껑위에 자배기를 지게에 교묘하게

올려놓았다. 이 당시에는 자배기와

독뚜껑은 특히 여인들이 잘 깨뜨리는 그릇이었다.


 
▲ 닭을 어리에 넣고 짊어지고 팔러 다니는 닭장수


 
▲ 연당의 여인


 
▲ 쌍검대무


 


▲ 단오풍경


 
▲ 신윤복의 미인도


 
▲ 옹기그릇 시장


 
▲ 연소답청


 
▲ 청금상령


 
▲ 주사거배


 
▲ 월하정인


 
▲ 월하밀회


 
 ▲ 누룩과 찰밥으로 지은 지에밥(술밥)을

햇볕에 펼쳐 놓고 말리고 있다.


 
▲ 복덕방 할아버지들



▲ 한강 용산 나룻터


 
▲ 참숫 팔러 가기


 
▲ 1900년 무렵의 조선 호랑이 사냥군들


 
▲ 여성들이 외출때에 쓰는 파라솔, 양산 대용


 
▲ 평양의 장터


 
▲ 일본의 조선 철도 기공식
당시 신작로가 전부였던 조선에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반도 곳곳에는 급속히 철도가 부설되기 시작했다.

전체적으로는 그 길이는 총영장 5, 000km에 이르렀다.

이때문에
"일본은 한국 식민지 정책에서 남은 것이 없다"고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천하 대장군과 천하 여장군


 
▲ 기생의 나들이


 
▲ 서당의 학생들


 
▲ 쌀 티고르기



▲ 옹기 장사꾼들이 시장으로 같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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