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에 / 조지훈 검정 수목 두루마기에 흰 동정 달아 입고 창에 기대면 박 넌출 상기 남은 기울은 울타리 위로 장독대 위로 새하얀 눈이 나려 쌓인다 홀로 지니던 값진 보람과 빛나는 자랑을 모조리 불사르고 소슬한 바람 속에 낙엽처럼 무념히 썩어 가면은 이 허망한 시공 위에 내 외로운 영혼 가까이 꽃다발처럼 꽃다발처럼 하이얀 눈발이 나려 쌓인다 마음 이리 고요한 날은 아련히 들려 오는 서라벌 천년의 풀피리 소리 비애로 하여 내 혼이 야위기에는 절망이란 오히려 나리는 눈처럼 포근하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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