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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보는 엉덩이 미학

*설향* 2008. 6. 5. 00:31
그림으로 보는 엉덩이 미학

 

 

영장류에 속하는 193종 가운데 인류만이 매끈하게 돌출된 반구형 엉덩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에 대한 미감을 일찍부터 알아차린 예술가들은 엉덩이를 작품의 주된 소재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시대에 따라 미의 기준이 바뀌듯 고대부터 현대 미술 작가에 이르기까지 엉덩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각기 달랐다.

 



털로 뒤덮인 납작한 엉덩이가 보드라운 살결로 싸인 곡선형을 갖추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인류가 직립보행을 하면서 엉덩이 근육이 발달하게 되었고, 점차 지금과 같은 모양을 갖추게 되었던 것. 우리와 가장 가까운 종(種)이라고 여겨지는 침팬지의 엉덩이도 사람에 비하면 밋밋하기 그지없는 형태이다. 취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살집이 없는 마른형보다는 풍만한 쪽을 훨씬 더 매력적으로 여겼던 것 같다.

 

현대 이전, 남성 화가가 대부분이었던 시절에 그려진 누드 여성들을 보면 이런 면이 확연히 드러난다. 르네상스 시대에는 뽀얀 피부색과 탱탱한 질감이 아름다움의 여부를 좌우하는 요건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설화석고처럼 희거나 맑은 갈색을 띠고, 복사꽃처럼 부드러운 혈색이 돌고, 살결이 탄탄하고 포동포동하되 너무 뚱뚱하거나 살이 무르지도 않은 엉덩이를 최고로 여겼다.

 

그러나 이는 여자에 한해서다. 둘 사이에는 미학적 차이가 날 수 밖에 없다. 남자의 엉덩이는 근육의 기복에 의해 그 형태가 잡히지만 여자의 엉덩이는 지방 조직이 얼마나 잘 퍼져 있느냐에 따라 심미성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남성은 2백억 개의 지방 세포가 있지만 여성은 그 두 배, 즉 4백억 개의 지방 세포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남성의 엉덩이는 작고 좁고 단단하고 근육질인 반면 여성의 엉덩이는 훨씬 더 펑퍼짐하고 부드러운 것이다.

 



 

오달리스크의 엉덩이 곡선을 따르는 시선
오달리스크란 원래 터키의 하렘에서 황제를 모시던 여자 노예들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다가 1765년에 하렘의 모든 여자를 통칭하는 단어로 바뀌었다. 등을 보이고 옆으로 길게 누워있는 오달리스크는 시선을 고정한 채 미동도 하지 않는다. 때로는 팔꿈치를 괴거나 엉덩이를 드러내기도 하고, 극도로 권태롭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배를 깔고 엎드려 있기도 한다. 물론 항상 누드인 채로 말이다.

 

이처럼 화가에 따라 약간씩 다른 포즈로 그렸지만, 어떤 오달리스크든 그녀의 엉덩이 곡선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게 한다는 것은 공통점이다.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는 오달리스크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였다. 등을 보인 채 검은 침대 시트 위에 누워 있는 그녀는 나체의 푸토(Putto, 르네상스 시대의 장식적인 조각으로 큐피드 등 발가벗은 어린이의 상)가 들고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본다.

 

여기서 비너스는 허영의 여신을 우의적으로 암시한 것으로, 작품 속에 터키를 연상시키는 요소는 전혀 없다. 엉덩이가 검은 시트와 대조를 이루면서 눈부시게 빛나고, 나이 든 여인처럼 살이 처지거나 물렁해 보이지도 않지만 오달리스크적인 신비감과 매력은 느껴지지 않는다. 젊고 날씬한 사랑스러운 여성일 뿐. 반면, 신고전주의 시대의 대표적 화가인 장 오귀스트 앵그르(Jean Auguste Ingres, 1780~1867)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년)’는 이와는 사뭇 다른 감흥을 준다. 이국적인 스타일의 커튼과 장식물 등 동양적인 스타일을 배경으로 누워있는 여인은 유려하기 그지없다. 백조의 목이나 연체 동물의 다리처럼 길고 흰 팔을 길게 늘어뜨린 그녀의 뒷모습을 자세가 매우 특이하다. 아니, 비스듬히 누운 여인의 허리는 기형적일 정도로 길다. 사람들이 그림을 분석해 보니 실제 인체보다 척추 세 마디를 늘려서 그린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등허리선의 아름다움을 위해 대담한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 형태 왜곡)을 마다하지 않았다.

 

photo01

그림 속 마르트의 엉덩이 나이는 24세
목욕 준비를 하고, 욕조에 막 들어서고, 욕조 안 물 속에 길게 누워 있고, 목욕을 마친 후 분가루를 바르고….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 1867~1947)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여인은 일생을 누드로, 그리고 목욕탕 안에서만 살았을 것 같다. 또한 그의 일과는 이런 그녀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는 일뿐이었을 테고. 사실 보나르는 반세기에 걸쳐 그와 동거했던 연인 마르트를 그렸지만 그림 속에서 그녀의 육체 나이는 언제나 24세였다.

 

초기 작품인 ‘휴식’(1900년)은 마르트가 누드로 침실에 누워 있는 모습이다. 그림 속에서 그녀는 침대 한 쪽 끝에서 얼굴을 두 팔로 파묻은 채 엎드려 있다. 잠을 자고 있는 것일까? 글쎄, 구부린 왼쪽 다리와 엉덩이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있는 것을 보면 그런 것 같지만은 않아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여성의 엉덩이를 세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내부에 원이 완벽하게 그려지는 정사각형 엉덩이, 호리병처럼 생긴 직사각형 엉덩이, 옆으로 퍼진 직사각형의 엉덩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생김새를 구분하는 것은 별다른 의미가 없는 듯하다.

 

싫고 좋음이 드러나는 얼굴과 달리 엉덩이는 속내를 드러내는 표정을 짓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긋이 부풀어 오른 엉덩이를 무심히 바라보기란 쉽지 않다. 작품 ‘휴식’ 속에 누워 있는 마르트의 엉덩이 또한 아무 말도, 별다른 몸짓도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보는 이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야릇한 마력이 있지 않은가.

 

 

 

 

photo01 박영숙 달항아리展
국내외 미술 애호가들이 달항아리에 열광하는 이유는 빛깔과 모양 때문이다. 명칭 또한 투명한 백자의 유색(釉色)이 달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것. 아무 문양도 장식도 없이 소박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기에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풍기는 도자기라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한편 인체에 비유해 본다면 달항아리는 엉덩이를 연상시킨다.

 

우윳빛 투명한 빛깔도 그러하지만 둥근 대접을 두 개 맞붙여 구워낸 까닭에 가운데 이음새가 있고, 무엇보다 풍만한 곡선의 형태를 보면 영락없다. 그러나 한두 번 보아서는 달항아리의 미감을 알아챌 수 없다. 비슷한 사발 두 쪽이 만나 하나의 몸체를 갖추기 위해 가마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한쪽이 살짝 이지러진 그 형태에서 조형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면 수십 번, 수백 번은 보아야 할 것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조선시대 백자 달항아리의 조형적 아름다움을 되살려내기 위해 20여 년간 노력한 박영숙 씨의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녀는 조선시대의 것보다 훨씬 크고, 풍만함보다는 준수함에 무게를 두어 너비보다 높이를 좀더 크게 만드는 등 달항아리를 현대적으로 풀어냈다.

 

 

 

 

 

Nude Back of Woman

 

 


Single Nude Back

 

 

 마르쿠스 루퍼츠
1970년대에 주류를 이루던 추상회화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신 표현주의는 인간의 육체를 비롯해 다양한 사물을 알아볼 수 없는 형태와 거친 처리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이 특징이다. 마르쿠스 루퍼츠는 이러한 신표현주의 맥락을 따르면서 작가 고유의 표현 양식을 더해 다양한 이야기가 담긴 작품을 그리는 독일의 대표적인 작가.

 

구동독 출신인 그는 1963년에 서베를린으로 이주하는데,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그곳에서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이후 거친 필치로 겹쳐서 표현하는 기법을 통해 이런 감정을 캔버스 위에 암시적으로 드러내는데, 작가의 철학적인 삶에서 비롯된 인지될 듯 말 듯한 형상이 자아내는 미묘한 울림은 관람객의 시선을 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회화부터 최근작인 ‘벌거벗은 뒷모습(Nude Back)’ 시리즈 등이 소개된다. 특히 루퍼츠의 예술적 탐구와 시각을 통해 구체화된 벌거벗은 뒷모습 시리즈는 인체에 대한 새로운 미감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아치형의 날렵한 곡선과 풍만한 곡선의 미
다다이즘과 아방가르드 미술의 선두에 섰던 만 레이(Man Ray, 1890~1976)는 비평가와 대중들의 비난을 감수하면서 탐미적인 예술을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 그는 <하퍼스 바자>, <보그>, <베너티 페어> 등과 같은 유명 잡지에서 패션 상업 사진을 찍으면서, 개인적으로 기존 사진의 경계와 한계를 넘기 위한 다양한 실험을 꾸준히 했다. 여자의 뒷모습을 첼로로 형상화해서 촬영한 사진 ‘키키-앵그르의 바이올린’(1924년)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 꼿꼿이 세운 등과 두 개의 아치형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는 엉덩이는 더없이 예술적으로 느껴진다.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리라(배(梨) 모양의 현악기)나 활처럼 어떤 때는 팽팽하게 긴장했다가 어떤 때는 이완되곤 하는 곡선의 엉덩이’는 둥근 지붕, 소용돌이 장식과 같은 곡선을 선호하는 바로크 미학과도 닮아 있다. 페르난도 보테로(Fernando Botero, 1932~)의 그림 속 모델은 하나같이 뚱뚱하다. 그들은 르누아르가 묘사한 몸집이 통통한 여인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살집이 붙은 둥글둥글한 얼굴에 조그맣고 동그란 두 눈과 이중 턱, 갓 구운 식빵처럼 부푼 팔다리에 겹겹이 접힌 뱃살은 풍만함을 넘어 거대한 물체로 느껴질 정도. 그러나 뚱뚱한 몸을 신나게 움직이며 탱고를 추거나 왁자지껄 파티를 즐기는 활기찬 모습에서 유쾌함과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래서 어마어마한 무게감과 양감에도 불구하고 보테로가 그린 엉덩이를 보면 기분이 나빠지지 않는다. 니키 드 생 팔(Niki de Saint Phalle, 1930~)의 조각 ‘나나’ 시리즈의 주인공 나나(Nana) 또한 엄청난 크기의 엉덩이를 드러내지만 이와 마찬가지다. 노란 꽃잎과 핑크빛 하트가 어우러진 과감한 무늬의 원피스 수영복을 입은 여인상의 얼굴은 엉덩이 한쪽보다도 훨씬 작아 비례라고는 전혀 맞질 않는다.

 

다채로운 빛깔로 채색하고 부분마다 등고선처럼 선을 긋거나 문양을 그린 조각상 ‘혼’(1966년)은 출산하는 자세로 바닥에 누인 길이 25m의 대작. 흥미로운 것은 벌린 다리 사이에 출입구를 만들어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하고, 자궁 속에는 이야기를 나누거나 영화를 볼 수 있는 공간을 두었다는 것이다. 어떠한 형태로 그려졌든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벌거벗은 뒷모습(당연히 엉덩이도 포함된다)’은 예술가들의 주된 소재였다. 몸 뒤쪽에 있는 까닭에 자신의 것을 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배설기, 생식기라는 기능적 차원은 차치하고 외형적인 모습만 살펴보았을 때, 포동포동하고 섬세하며 부드러운 살결로 ‘잘 다듬어진’ 엉덩이는 나름의 미학을 지니고 있음을 부정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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