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교통 수단
1899년 저 유명한 ‘전차폭동사건’ 이 일어난 후 전차는 한동안 정상적으로 운영되지 않았다. 전차의 정상 운행 재개는 1910년 후....
1921년 5월에는 하루 90,000명으로 급증.... 당시 서울의 대중교통수단은 전차가 전부였다해도 과언 이 아니었다.. 전차 車庫는 지금의 동대문종합상가 위치.
손님과 전차운전사 사이에 싸움이 곧잘 벌어졌다..운전사들이 손님을 우습게 여겨서 걸핏하면 뺨을 때리기도 했고, 승객은 승객대로 운전사가 건방지다며 핏대를 올려 전차 안에서 활극 이 자주 벌어졌다. 동대문 車庫 건너편에서 출발해 안암천·용두교를 건너 뚝섬 까지 운행...안암천 건널 때는 나무 철로의 다리가 흔들거려 가슴이 조마조마....이 고비를 넘기면 용두교 지나면서 인분 냄새가 아주 고약했다...왕십리와 뚝섬 일대의 채소밭에 뿌린 자연산(?) 비료....이 냄새와 함께 전차 안으로 파리떼가 몰려 왔다...이런 고생을 치른 후면 뚝섬의 한강 바람이 시원했다.
![]() 보신각 앞의 전차 갈림길(1935) ![]() 남대문로(남대문시장 앞)의 전차와 우마차 ![]() 전차 정류장 ![]() 종로선 ![]() 전차와 서대문(1914) ![]() 전차 정기승차권(左: 앞면, 右: 뒷면) ![]() 다리 위를 지나는 전차 ![]() 통학길의 전차 1920∼30년대의 버스는 포드 8인승·14인승의 소형이었 는데 이들 자동차 등장은 하나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한다’..‘기차보다 빠르단다’ 라는 논의가 벌어질 정도였다...1930년대 경성 시내의 전차와 버스 요금이 5전이었 는데, 경성역 구내 전화 이용에도 5전이 들었다.
관용 리무진 승용차가 왕실과 총독용으로 각 1대씩 들어 왔다. 1914년경부터 총독부의 고관과 주한외교관, 구왕 실, 친일 귀족들을 중심으로 승용차를 타기 시작했다.
대, 자가용 승용차는 984대에 불과했다. 있었다. 당시 서울의 길은 비좁았고, 한강에 인도교도 없어 자동차 다니기가 불편했다.
준공되자 자동차가 늘었고 자동차는 대개 美國産. 합자하여 포드 T형 자동차 2대를 들여와서 시간당 5원씩 받고 임대했다.
것을 감안하면 택시는 서민이 좀처럼 이용하기 어려웠 음을 알 수 있다. 종로3가 큰길 가에 주차장이 하나 있었는데, 10대 정도 부리고 있었다. 여기를 ‘차부’ 라 불렀다.
이곳에 전화를 두고 손님을 기다렸으니 일종의 ‘콜택시’ -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곧잘 ‘어디 어디로 차를 보내 주 세요’ 라고 거짓전화를 해 골탕을 먹였다. 하다가 요릿집에서 부르면 인력거 타고 갔다.
단골 인력거를 이용했다. 인력거는 인력거병문(인력거 방)이란 곳에 모여 있었다... 요샛말로 택시터미널.... 인력거꾼은 ‘합피’ 라는 짧은 두루마기 같은 윗도리에 반바지 - 신발은 검정이나 흰 헝겊으로 울(신발의 가를 두른 부분)을 하고, 바닥은 검정고무 댄 농구화 비슷... 끈이 없고 엄지발가락이 따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수건을 동여 맸고 겨울에는 방한모를 썼다. 하역 - 운수회사·운반업자와 계약을 맺은 마부·트럭기 사·지게꾼·리어카꾼으로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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