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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 격동기 민초들의 일상과 죽음 |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으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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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의 단면이 담긴 사진들을 제1부에 담았다. 도회의 모습을 담은 것도 있고 농촌의 풍경을 담은 것도 있지만,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어느 쪽이든 일상에는 큰 차이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대부분의 사진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관청으로 출근하는 관리나 돈푼깨나 있어 보이는 양반도 등장하지만 대개는 가난한 민초들의 일상이다. 몇몇 사진의 주인공이 여자와 아이들이라는 점도 재미있다. 전통사회에서 남녀와 장유(長幼)의 구별이 엄격했던 사실에 비추어보면, 특히 집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상생활의 편린을 엿볼 수 있는 진귀한 사진이 적지 않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짓거나 청소와 빨래, 절구질이나 다듬이질, 물 긷기 등의 집안일은 모두 여자들 몫이었다. 어른을 모시고 아이를 기르며 손님도 대접하고, 철 따라 명절이나 제사준비도 해야 했다. 그렇다고 베를 짜거나 농사 짓는 일을 게을리할 수도 없었다. 양반댁이야 조금 덜했겠지만 여자들의 하루하루는 몸이 견뎌내기 어려울 정도로 노동의 연속이었다. 다듬이질을 하는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물동이를 이거나 절구질을 하거나 요강을 닦는 아낙에 이르기까지 여인들을 담아낸 사진에서 그러한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여자들은 외출할 때 장옷을 입거나 삿갓을 써야 했다. 장에 다녀오는 정도의 멀지 않은 나들잇길에도 장옷을 걸쳤다.
아이들이 연날리기와 비석치기(혹은 돈치기를 하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를 하는 사진도 있는데, 일부는 이미 공개된 것이다. 사진 자체는 실내에서 연출된 것으로 보인다. 사내아이들은 서당에 나가 공부하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집안일을 도와야 했고, 가난한 집 아이들은 장에 나가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어디나 남자들의 삶이 비슷하기 때문일까. 성인남성의 일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그리 많지 않다. 관리는 아침에 조복을 입고 남여(籃輿)를 타고 등청한다. 한량들이 활터에 나가 활 솜씨를 뽐내거나 기생집에 앉아 술이며 음식을 먹고 마시는 모습도 카메라에 담겼다. 반면 민초들은 먹고살기에 바빴다. 농사짓는 일에 매달려 한 해를 보냈다. 소를 돌보아야 했고, 땔감을 구해 장작도 패야 했다. 장에 나갔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막걸리 한 사발 마시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으리라.
삶을 살아가며 반드시 맞이하는 관혼상제는 중요한 행사였다. 어쩌다가 세금을 내지 못하거나 이웃과 다툼이 커지면 관아에 끌려가는 일도 있고, 일이 잘못 풀려 볼기를 맞는 일도 있었다. 대부분의 민초는 평생 그럴 일이 없었겠지만, 무거운 죄를 지어 칼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지방관이 맡고 있던 재판권은 갑오경장 이후 제도적으론 재판소로 이관되었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지방 관리들이 행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동네에 일본인이 하나 둘씩 나타나고, 생전 처음 보는 큰 코와 흰 피부의 서양 선교사들이 지나가 주민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1900년대 후반에는, 왜적을 쫓아내려고 봉기한 의병들이 마을에 머무른 뒤 일본군이 들어와 죄없는 민초들을 죽이고 불을 질러 마을을 피폐하게 만들곤 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100년 전 민초들의 일상은 사실상 그 이전 수백 년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근대문물이 평민들의 일상생활에 파고들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들은 선대가 살아온 대로 살다 갔지만, 사진 속 아이들은 그렇듯 나른하게 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 불과 몇십 년 동안 한반도에 찾아든 변화는 몇백 년 계속되어온 생활의 근간을 격렬하게 흔들었기 때문이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은 그러한 미래를 짐작할 수 없었을 테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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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와 하인 간략한 사진 설명에는 ‘죄수’라고만 되어 있는데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혹 귀양살이하는 양반 죄인이 하인을 데리고 가는 광경일 수도 있겠지만, 옆의 담장으로 미루어 시골풍경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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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 개다리소반에 차려진 음식을 먹고 있다. 벽에 두루마기가 걸려 있고 신선도 병풍이 쳐진 것으로 보아 여염집은 아닌 듯하다. 여인네는 음식을 덜고 있는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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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 두 남자가 장터 주막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다. 돗자리 위에 놓인 개다리소반이며 엉거주춤한 자세가 인상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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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발굽 갈기 소를 이용한 농경은 삼국시대부터 시작됐다. 온순하고 인내심이 강한 소를 이용해 농사를 짓게 된 것은 농업기술 발달에 획기적인 일이었다. 소를 쓸모 있게 활용하려면 굽갈이는 필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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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청하는 관리 조복을 갖춰 입은 관리가 의자처럼 생긴 남여(籃輿)를 타고 관청에 출근하고 있다. 뒤에는 서류를 넣은 궤를 짊어진 하인이 따른다. 사진을 찍는 모습이 오히려 구경거리였던 듯 집안 사람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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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공사 세 명의 인부가 담장을 쌓고 있다. 나무틀에 돌과 진흙을 개어 넣어 토담을 쌓는 광경이다. 나무틀 안에서 흙을 밟아 다지는 인부가 흙을 쏟아 붓는 모양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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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추는 기생 기생이 부채춤을 추고 뒤에서 악사들이 장구와 징을 쳐 장단을 맞추고 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은 상황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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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이패 인간 피라미드를 이룬 놀이패. 아마도 동네에 큰 잔치가 있었던 모양으로, 사당패가 동네에 들어와 갖은 재주를 부리는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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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구질 두 아낙이 나무로 만든 절구통에 곡식을 넣어 공이로 빻고 있다. 나무절구는 통나무의 속을 파내 만들고, 공이는 손으로 쥐는 부분을 파내 둥글게 만든다. 혹 명절날 쓸 떡을 만들려고 절구질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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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에 다녀오는 여인네 동네 아낙들이 장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이다. 젊은 아낙들은 장옷을 입고 머리에 물건을 이었고, 나이 든 아낙들은 장옷도 물건과 같이 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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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갓을 쓴 여인 먼 길을 떠나는 젊은 여인이 방갓을 썼다. 오른쪽 사진은 같은 여인을 옆에서 촬영한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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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이질 여자아이 둘이 다듬잇돌에 세탁된 옷감을 놓고 방망이로 두들겨 다듬고 있다. 옆에서 동생들이 구경을 한다. 옷 손질과 바느질은 여성들의 일상이었다. 두 사람이 네 개의 방망이로 다듬이질을 하는 리듬감 있는 소리는 이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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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날리기 네 아이가 연 날릴 준비를 하고 있지만 시선이나 표정이 부자연스럽다. 이미 1890년대 초부터 널리 퍼진 연출기법에 따른 사진이다. 한 아이는 얼레에 연줄을 감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종이에 대오리를 붙이고 실을 매어서 공중에 날리는 연 놀이는 당시 어린이에겐 최고의 겨울 스포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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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치기 비석치기는 돌만 있으면 할 수 있는 놀이다. 선을 긋고 비석이라 부르는 작은 장방형의 돌을 세워두고, 조금 떨어져서 자기의 비석을 던져 상대의 비석을 쓰러뜨리는 방식이다. 여러 명이 모이면 패를 나누어 놀 수도 있었다. 이 또한 연출된 사진이다. |
제2부 - 장터와 장인(匠人), 경제생활의 풍경 |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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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에 수록된 사진들은 보통 사람의 경제생활과 관련된 것들이다. 배경이 되는 공간은 대개 도회의 장터다. 익숙한 사진도 더러 눈에 띄지만, 이렇듯 한데 모인 장터 풍경 사진은 당시 민초들의 생활을 보다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다.
장은 5일장이 일반적이었다. 전국 곳곳에서 지역의 중심이 되는 고을에 닷새마다 장이 돌아가며 열렸다. 장돌뱅이들은 장 서는 고을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팔고 또 샀다. 서울에는 시전(市廛)이 있어서 궁중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고 일반의 생활용품도 공급했지만, 지방에서는 몇몇 지역에야 겨우 상설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진의 배경에 전신주가 서 있고 성벽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사진 속의 장은 서울을 비롯한 큰 도회의 한가로운 장터로 짐작할 수 있다.
목재소·대장간·잡화상·음식점 등은 가게를 갖추고 있었다. 다듬잇방망이나 통·갓·오지확 등을 파는 상인들은 좌판을 벌였다. 엿이나 광주리, 옹기는 행상들이 엿판이나 지게에 지고 팔러 다닌다. 시장에서 좌판이나 행상을 하는 이의 대부분은 자신이 직접 물건을 만들어 팔았다. 다듬잇방망이나 통을 그 자리에서 능숙하게 만드는 광경이 렌즈에 잡혔다. 지게에 밥상을 잔뜩 얹은 모습은 아예 신기(神技)에 가깝다.
운반수단으로 가장 많이 이용된 것은 단연 소였다. 소달구지에 물품을 실어 이동하거나 소 등에 가득 싣기도 했다. 소는 농사를 지을 때 뿐 아니라 장에 나갈 때도 유용했던 것. 특히 장작이나 솔가리를 내다 파는 나무장수들은 대개 장사가 본업이 아닌 농부들이었다.
시장 풍경을 담은 사진에서 발견되는 공통점 중 하나는 단발한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이들이 장사에 나선 경우가 적지 않은데 모두 머리를 땋았고 어른들은 상투를 했다. 1895년 단발령이 발표되었음에도 1900년대 초반에 촬영한 사진에 나타난 한국인 대부분이 단발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또 한 가지 특기할 것은 시장에 여자가 별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노점을 하는 아낙 몇과, 상점 앞을 지나가거나 음식점에서 나오는 여자가 전부이다. 지역적인 차이가 있었겠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장에 여자들이 나가는 일을 꺼렸음을 시사한다.
갓을 쓴 노인도 눈에 띄지만 대부분은 쓰지 않았다. 의관을 갖춘 양반이 시장에 나오는 일은 여전히 드문 일이었을 것이다. 양복을 입은 사람은 아예 찾을 수가 없는 것을 보면 양복 입는 ‘개화쟁이’는 다른 형태의 상점을 이용했던 모양이다. 담뱃대를 물고 있는 상인이 여럿 보인다. 궐련을 피우는 이는 배추밭 주인이 유일해 아직 궐련이 널리 보급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이들이 장에서 엿이나 광주리, 짚신, 빗자루 등을 파는 풍경에선 가난한 현실을 엿볼 수 있다. 더벅머리에 짚신도 못 신어 맨발인 아이도 있다. 두루마기에 갓까지 쓴 새신랑 같은 청년이 닭장을 메고 장에 나온 모습은 묘한 부조화를 자아낸다.
흔히 시장에 가면 살아 있음을 새삼 깨달을 만큼 역동성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2부에 담겨있는 사진들에서는 그러한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손님이 적어서일까, 전체적으로 무기력한 분위기다.
100년 전 이 땅에는 근대로 옮겨가는 바람이 불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의 풍경에서는 그 같은 변화의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전통사회의 시장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삼천리 곳곳 민초들의 삶의 양상이 총체적으로 바뀌는 일은 서울의 조정이 주도하는 외형적인 조건의 변경만으로는 불가능했다. 개항을 하고 외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도 민초들의 생활에는 와 닿지 않았던 것이다. 삶의 변화는 그처럼 더디고, 그만큼 가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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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듬잇방망이 만드는 노인 다듬이질에 쓰는 방망이를 깎는 노인. 남의 집 앞에 좌판을 벌였다. 연장으로 나무를 깎고 매끄럽게 다듬는 일에 몰두하는 모습에서 장인 정신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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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재소 긴 톱으로 나무를 자르는 광경. 목공 둘이 위아래에서 톱을 마주잡고 끌고 당기며 나무를 켜고 있다. 주위에는 굵기별로 다른 재목이 쌓여 있다. 당시에는 집을 나무로 지었기 때문에 목재의 수요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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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 만드는 장인 담장 앞에 좌판을 열고 통을 만들고 있다. 담뱃대를 입에 물고 능숙한 솜씨로 연장을 써서 나무를 만진다. 앞에는 견본품이 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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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간 대장장이가 풀무에 달군 쇠를 두드려 연장을 만들고 있다. 뒤로 보이는 소년이 풀무에 바람을 넣어 불의 세기를 조절한다. 당시 사람들은 농기구나 연장이 필요하면 장날 대장간에 들러 주문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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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판 장으로 가는 길목에 한 소년이 좌판을 열었다. 오지그릇 안에 가로세로로 돌기를 만들어 물건이 잘 갈리도록 한 오지확을 늘어놓았다. 손님이 없을까 걱정하던 소년에게 지나던 장정이 흥정을 붙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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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점상 장터에 노점이 늘어섰다. 지게꾼들이 보이고 아낙들이 모여 있다. 햇살이 따가웠는지 우산을 펴둔 좌판 아낙에게 머리에 물건을 인 아낙이 흥정을 벌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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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장수 옹기는 독과 황갈색 질그릇을 총칭하는 말이다. 조선 백성들의 식생활이 장과 김치 등 발효식품 중심이었기 때문에 장독은 필수품이었다. 대개는 옹기점에서 팔았지만 사진처럼 지게에 옹기를 지고 거리나 집집을 돌며 파는 장사꾼도 흔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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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장수 닭 요리는 음식이라기보다는 보신용에 가까웠다. 닭장을 통째로 지고 시장에 나온 청년은 갓까지 쓰고 있다. 아마도 정작 본인은 집에서 기른 닭으로 삼계탕 한번 못 해먹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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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 시장에 늘어선 점포에는 없는 것이 없었다. 만물상이라고 불리던 잡화점에 농기구며 가정용품 등이 흩어져 있다. 재봉틀이 보이는 곳에 재봉소라는 간판이 내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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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점 길거리 쪽으로 음식재료를 펼쳐놓은 음식점. 뚝배기가 포개져 있는 것으로 보아 장국집인 것 같다. 장에 나와 필요한 물건을 찾다가 배가 출출해진 사람들이 국말이로 요기를 하던 곳이다. 서서 음식을 먹던 손님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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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색 가게 장터에 판을 세워놓고 옷감에 물을 들이는 모습. 가게는 뒤에 있었을 것이다. 물동이를 인 아낙이 지나가다 멈춰서 구경하고 있고, 사진 찍는 것이 신기했던지 아이 둘이 바라보고 있다. 맞은편에 안경방이 보인다. |
제3부 - 대한제국의 끝과 통감정치의 시작 |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바람은 공산에 찬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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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부는 역사적인 사건과 관련된 인물이나 종교·풍속에 관한 사진들이다. 이미 소개된 것도 일부 있다. 우선 대원군의 사진은 교과서에 실릴 만큼 널리 알려진 것이다. 관복을 입은 이 사진 외에 대원군이 중국 베이징 근처 바오딩(保定)에 유폐되었을 때 사진관에서 찍은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어가행렬과 황태자비의 장례식, 러시아 군사교관 사진도 종종 볼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 군사교관과 훈련받는 한국군 사진은 채색된 것도 있다.
눈이 밝은 독자라면 이들 사진에서 근대로의 변화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군인의 경우 구식군대와 신식군대의 사진을 나란히 놓고 보면 그 변화가 바로 드러난다. 어가행렬을 호위하는 구식군대 군인들의 차림새와 서양식 모자에 각반을 치거나 구두를 신은 신식군대 군인의 차림새는 쉽게 대비된다.
이들이 들고 있는 무기도 다르다. 총이나 서양식 칼에 맞선 전통적인 칼이나 창이 풍기는 분위기에서 변화가 감지된다. 그런 점에서 전통 관복을 입은 관리와 서양식 복장을 한 순검이 함께 찍은 사진은, 전통과 근대의 공존을 보여주면서도 변화가 가리키는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그러한 분위기는 황태자비의 장례식 사진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시기의 사진에선 외세의 창궐 또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개항 이후 한국은 열강의 각축장이었다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일본이 독무대를 이룬다. 사진 속 러시아 군사교관이 머물던 시기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사이였다. 일본이 국권(國權)을 침탈하자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 시기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하는 일본군과 일본군에 체포되어 호송당하는 의병을 찍은 사진이 남아 아픈 역사를 말 없이 증언한다. 무장해제된 남루한 복장의 의병과 집총한 일본군, 그리고 그 광경을 웃으면서 바라보는 일본인. 한 시대의 비극이 엉성한 구도의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것이다.
태극기와 일본기 사이로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요시미치의 얼굴이 보이는 사진도 우리에게는 아프게 다가온다. 한국침략의 원흉인 두 사람 옆에 태극기가 게양된 사진 한 장은 1905년 이른바 을사조약에 따라 통감부가 설치된 후 한반도의 현실을 여실히 보여준다. 일본은 을사조약을 한국 내정 장악의 기회로 삼아 결국 국권을 빼앗고 만다.
서양인들이 찍은 사진에는 교회나 미션스쿨이 자주 등장하는 데 비해, 일본인들의 관심은 사찰을 비롯해 불교와 관련한 사진에서 읽을 수 있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자마자 사찰령을 내려 한국불교를 장악했다. 1911년의 일이다. 또한 일본불교의 한국 전도에도 열심이었다. 불단이며 범종 사진이 다수 포함되어 있는데, 향후 불교를 장악하기 위한 관심의 일단이 아니었나 싶다.
남산 국사당 안의 무신도도 널리 소개된 풍경이다. 민간신앙의 중심이었던 국사당은 1925년 인왕산으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만들면서 취한 조치였다. 남산은 서울을 수호한다 해서 목멱대왕(木覓大王)에 봉한 곳인데, 일제는 그 기를 막으려 남산 아래 공사관을 설치하고 일본인 거류지로 삼았다. 을사조약 이후 공사관은 통감부가 되었고 경복궁에 새 청사를 지을 때까지 총독부로 사용됐다. 그리고 조선신궁을 남산에 지으면서 국사당을 쫓아낸 것이다.
3부에 수록된 사진은 비록 그 숫자는 많지 않지만 전통과 근대를 보여주며 나라 잃은 슬픔을 표정 없이 드러내는 이미지들이다. 하지만 그 표정 없음이 의미 없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글을 읽을 때 행간을 통해 못다한 이야기를 찾는다고 하듯 이 사진들 속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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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고종의 부친. 1820~98년. 1863년 말 고종이 즉위하자 섭정이 되어 실권을 잡고 쇄국정책과 개혁정치를 추진했다. 1873년 실각했다가 1882년 임오군란과 1894년 갑오경장 직후 일시 집권한 바 있다. 고집스러워 보이는 눈과 얼굴 윤곽에 성품이 그대로 묻어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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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가 행렬 임금의 행차가 수표교를 지나는 모습. 호위군인들이 전통적인 복장을 한 것으로 미루어 시기는 1890년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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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자비 장례식 1904년 황태자비의 장례식 광경. 뒤에 순명효황후(純明孝皇后)로 추증된 황태자비는 민태호의 딸로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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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군대의 지휘관 군복을 차려 입고 칼을 잡고 있는 구식군대의 지휘관. 도도한 자세에도 쇠잔해 몰락해가는 권위가 엿보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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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갑사(甲寺) 불단 사찰의 대웅전에 불상이 안치돼 있다. 여러 형태의 불상이 안치된 이곳은 계룡산에 있는 갑사로 삼국시대 이래 여러 차례 중건된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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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에서 열린 잔치 절에서 환갑잔치라도 연 듯하다. 앞쪽에 행사의 주인공이 근엄한 모습으로 앉아 있고, 뒤쪽에 스님들이 앉았다. 나이 든 스님은 경건하게 합장을 한 반면 젊은 스님은 사진에 정신을 빼앗긴 듯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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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 국사당의 무신도(巫神圖) 남산 국사당은 서울을 수호하는 신당으로 조선시대에는 이곳에서 국가의 공식행사인 기우제나 제사 등을 지냈다. 조선 말기에 그려진 무신도가 걸려 있다. 1925년 일제가 남산에 조선신궁을 건립하며 국사당을 인왕산으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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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과 솟대 동네 어귀나 길가에는 장승과 솟대가 세워졌다. 마을을 지켜준다는 단순한 민간신앙뿐만 아니라 지역과 지역의 경계를 표시하거나 이정표의 기능을 갖는 상징물이었다. |
제4부 - 서울과 궁궐, 평양과 성곽 이야기 |
남문을 열고 파루를 치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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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부는 서울의 궁궐, 그리고 평양의 고적이나 풍경사진으로 꾸몄다. 한말부터 1910년 전후의 관련 사진이 그간 적지 않았지만, 여기에 소개되는 사진은 그 각도나 내용에 차이가 있어 느낌이 새롭다.
궁궐은 임금이 사는 곳이다. 임금은 궁궐에서 정무를 보며 일상생활도 했다. 서울에는 정전(正殿)인 경복궁을 비롯해 창덕궁·창경궁·경운궁(덕수궁)이 있었다. 궁궐에 관한 사진은 대부분 건물을 찍은 것이어서 경복궁의 강녕전과 집옥재, 건청궁 일부와 향원정을 볼 수 있다. 100년 전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누각, 덕수궁의 원경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궁중 연회 뒤에 여악과 악사가 귀빈을 모시고 찍은 사진이다. 건물의 상당수가 수리와 복원을 통해 오늘날까지 남아 있지만, 막상 100년 전 시점에서 보니 특별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서울 시내를 담은 사진은 크게 오래된 고적들, 100년 전 그 시절에 지은 건물, 그리고 풍경을 포함한 생활상으로 나눌 수 있다. 의정부·돈의문(서대문)·흥인지문(동대문)·원각사 석탑·원각사비·관왕묘·석물 등은 당시까지 남아 있던 고적들이다.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비는 1902년 세워진 것이고, 대관정·독립문·독립관·영국공사관·러시아공사관 등은 1890년대에 지은 건물이다.
통감관저·경성우편국·일본군 사단사령부·대한의원 등의 건물은 1900년대에 일본이 한국침략과 관련해 건립한 것들이고, 경성이사청은 1896년에 영사관으로 지은 것이다. 독립관을 제외하면 모두 서양식 벽돌건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강철교도 1900년에 완성되었다. 이외에도 서울의 동네풍경을 담은 사진,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는 사람들, 꽁꽁 언 한강에서 낚시하는 장면은 당시 평범한 서울 사람의 생활을 잘 보여준다.
독립문과 독립관은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의 자주독립을 목적으로 서재필(徐載弼)이 주도하던 독립협회에서 건립했다. 러시아공사관은 1896년 고종이 1년을 머문, 이른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배경이 된 바로 그 건물이다. 공사관을 제외한 근대 건축물은 대부분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침략의 양상이 건물로도 확인되는 셈이다.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였고 고려시대에는 서경이라 칭하며 중요시했으며, 조선시대에도 관찰부가 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군사적으로도 요충지여서 평양성을 둘러싼 문을 공들여 쌓았고, 대동강 주위에는 아름다운 정자며 누각이 많다. 그러나 평양은 남북이 분단된 이후 쉽게 가볼 수 없는 곳이 되었다.
먼저 평양의 성문을 하나하나 담은 사진이 있다. 대동문·칠성문·현무문·전금문 등이 그것이다. 또 부벽루와 을밀대·득월루·연광정 같은 정자들이 대동강의 풍광을 배경삼아 빼어난 자태를 자랑한다. 이들 성문과 누각·정자는 현재 남아 있거나 복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기자릉을 담은 사진도 있다.
서민들이 대동강에서 빨래를 하고 얼음을 채취하는 모습도 사진에 담겼다. 서울에서 한강이 그러했듯, 평양의 일상이 대동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이 평양에 세운 이사청 건물과 일본인 거류지는 물론 대동강 철교까지 한국침략의 한 방편이었다. 이들 사진을 빼면 근대화된 풍경을 담은 사진은 없다. 한국의 ‘근대’는 사진을 촬영한 일본인에게는 관심사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서울의 궁궐과 유적, 또 평양의 성문과 누정을 비롯한 고적은 모두 눈에 익숙하다. 수천 년의 나날들에 비하면 60년 분단의 세월은 순간에 불과하다는 것을 이 사진들은 말해준다. 대동강변 부벽루를 산보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기대하는 것이 어디 한 사람의 꿈일까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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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함녕전(咸寧殿) 일대 원래 경운궁(慶運宮)으로 불리던 덕수궁은 1907년 고종이 일제의 강요에 의해 퇴위하고 머물면서 궁호가 덕수궁으로 바뀌었다. 함녕전은 황제의 침전으로 1897년 러시아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이 환궁하며 세운 전각인데, 1904년 화재로 소실돼 중건하였다. 1919년 1월 고종은 이곳에서 승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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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부용지(芙蓉池)와 주합루(宙合樓)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과 누각. 낮은 골짜기에 연못을 만들고 부용정이라는 정자를 세웠다. 어수문(魚水門)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2층 건물이 나타난다. 1층 규장각(奎章閣)은 수만 권의 책을 보관하던 서고였고, 이층 주합루는 도서를 열람하며 풍치를 즐기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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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관람정(觀纜亭)·존덕정(尊德亭)과 반도지(半島池) 창덕궁 후원의 연못과 정자. 관람정은 지붕이 합죽선 부채꼴이다. 존덕정은 2층 겹 육모지붕의 정자다. 아래로 흐르는 물은 한반도 지형을 본떴다는 반도지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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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건청궁(乾淸宮) 일부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일본인 낭인자객들에 의해 시해당한 을미사변의 현장이다. 1873년 창건되었으나 국권피탈 후 일제가 헐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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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중연회 뒤 기념촬영 궁중 연회에서 가무는 주로 의녀(醫女)들이 맡았다. 의녀들은 의술 이외에도 악기와 노래, 춤을 배워야 했다. 사진은 덕수궁에서 연회를 마친 뒤 양복 입은 귀빈을 모시고 여악(女樂)을 맡았던 기녀들이 앞에, 장악원(掌樂院) 악사들이 뒤에 서서 기념촬영한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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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議政府) 조선시대 최고 행정기관이었던 의정부는 갑오개혁 시기인 1895년(고종 32) 내각으로 개편되었다가 이듬해 환원되었고, 1907년에 다시 내각으로 개편되며 폐지되었다. 광화문 동편에 있던 이 건물은 지금은 공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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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주변 1893년 남산 기슭에 세워진 일본공사관 주변 모습. 왼쪽 위편에 깃발이 꽂힌 서양식 건물이 일본공사관이고, 일장기가 있는 곳이 영사관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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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지(圓覺寺址) 십층석탑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 석탑. 높이 12m. 국보 제2호. 탑골공원 자리는 조선 초기 원각사라는 큰 사찰이 있던 곳이다. 원각사지 십층석탑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는데, 형태가 특수하고 화려함과 기교에 있어 조선시대의 석탑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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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각사비 탑골공원에 있는 조선시대의 비. 1471년에 건립된 것으로 높이 4.9m, 비신(碑身) 너비 1.3m이다. 보물 제3호. 귀부(龜趺)는 화강암, 비신은 대리석이다. 탑골공원에서 놀던 아이들이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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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 도선 노들나루라고 불린 노량진은 서울과 과천·시흥을 연결해 충청도와 전라도로 나가는 길목이었다. 1910년대 인도교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한강을 건너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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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왕묘(關王廟) 관우(關羽)를 받들기 위하여 건립한 묘당으로 지금의 신설동에 위치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군사들에 의해 남대문 밖에 건립되었는데, 이후 동대문 밖에도 동관왕묘가 건립되었다. 이 동관왕묘는 1602년에 완성된 것으로 중국의 관왕묘를 그대로 본떠 지었다고 한다. 아이들이 한가롭게 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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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산 산영루 북한산 자락에 있던 누각. 현재는 주춧돌만 남았지만, 사진을 들여다보면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정취를 즐기던 시인묵객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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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우편국 경성우편국은 1900년 일본거류민 편의시설로 지금의 충무로2가 서울중앙전화국 부근에 건축되었다. 1905년 한일통신협정으로 서울 전체의 우편사업을 맡게 되었고 통감부 설치 후에는 그 휘하기관이 됐다. 2층의 벽돌건물이었는데, 1915년 경성우편국 새 건물이 들어선 뒤 그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 주변에서 인력거꾼과 지게꾼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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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의원 1907년 세운 국립병원 겸 의학교로, 일본인들이 의료사무를 관장하던 기관이다. 종로구 연건동 마두산 언덕에 있는 이 건물은 1908년 5월 준공되었는데, 붉은 벽돌 2층 건물로 중앙에 시계탑을 배치했다. 현재 서울대학병원 구내 의학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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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사단사령부 용산에 주둔한 일본군 제20사단 사령부.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이 한국에 주둔했는데 사령부가 처음엔 필동에 있다가 용산으로 이전했다. 이후 용산은 일본군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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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칠성문(七星門) 평양 모란봉(牧丹峯)에 있는 성문. 전형적인 고구려성으로 현재의 문루는 조선 숙종대에 개수한 것이다. 을밀대(乙密臺) 쪽에서 등성이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오는 성벽과 만수대에서 북쪽으로 뻗은 성벽을 어긋나게 쌓고, 그 두 성벽 사이에 가로 세워 성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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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현무문(玄武門) 평양 금수산(錦繡山)의 성문. 모란봉과 을밀대 사이에 있다. 역시 고구려 때 축조되어 조선 숙종대에 중건됐다. 성문 축대는 다듬은 돌로 선과 면을 갖추어 정연하게 쌓았다. 칠성문과 함께 고구려 성곽건축의 특징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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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부벽루(浮碧樓) 산 위의 사람들은 대성산으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른쪽에 언뜻 모란대가 보이고 왼쪽 성벽을 따라가면 을밀대로 이어지는 위치다. 오른쪽 대동강가에 있는 누각이 부벽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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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모란봉(牧丹峯) 대동강 주변의 절경을 담은 사진이다. 왼쪽 봉우리가 모란봉이고 부근은 금수산이다. 오른쪽 섬은 능라도(綾羅島)이며 산 중턱에 부벽루가 보인다. 그 아래 문은 전금문(轉錦門), 누각은 득월루(得月樓)다. 머리에 짐을 인 아낙들이 지나는 곳은 청류벽(淸流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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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을밀대(乙密臺) 모란봉 중턱에 있는 누각. 사방이 틔어 있다 해서 사허정(四虛亭)이라고도 부른다. 고구려 때 세운 것을 조선 숙종대에 다시 세웠다. 고구려 축성술을 엿볼 수 있는 축대의 높이는 11m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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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얼음 채취 한겨울, 대동강이 꽁꽁 얼었다. 강 얼음을 채취해 얼음창고에 저장했다가 여름철에 사용하는 것은 평양의 오랜 관습이었다. 얼음을 캐낸 자리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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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에서의 빨래 이른 봄, 대동강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자 아낙들이 강기슭에서 겨우내 밀린 빨래를 하고 있다. 아직 강이 다 녹지 않아 얼음덩이가 떠다닌다. 강 건너편은 선교리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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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강 철교 평양 시내와 선교리를 잇는 기차철교로 1905년에 준공되었는데, 평양역과 대동강역 사이에 있었다. 길이는 약 760m. 왼쪽은 나무로 된 인도교. 철교 아래로 나루터가 보인다. 철교에 일장기가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한 행사가 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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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 신시가지 평양의 일본인 거리. 한옥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일장기가 내걸린 건물이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략 평양역 근처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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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이사청 이사청은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영사관이 개편된 관청이다. 사진은 1909년 1월 순종이 서북지역을 순행하는 중에 평양에 도착한 것을 환영하는 뜻으로 정문에 아치를 만들어 태극기와 일장기를 함께 내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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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남포 전경 1897년에 개항된 삼화부(三和府)로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던 항구. 일본과 청의 상인이 많이 거주했으며, 1910년 진남포부가 되었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에는 일본의 주요 군수품 수송기지로 활용되었다. |
제5부 - 개항장과 삼천리 강산의 경관 |
산천 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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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부에는 서울과 평양을 제외한 전국의 고적과 풍경 사진을 모았다. 수원·인천·개성·공주·충주·군산·목포·대구·부산·함흥·회령 등 큰 도시의 풍경을 담고 있으며, 개항장의 경우 관청이나 거류지 등 일본인과 관련된 사진이 많다. 강원도와 황해도 관련 사진은 없고, 전라도 역시 개항장의 사진 몇 장이 전부다.
우선 수원 화성을 공들여 찍은 사진이 여럿이다. 장안문·화서문·화홍문·방화수류정·화성장대·용연·동북공신돈이 그것이고, 건릉과 화녕전, 용주사까지 넣으면 사진의 대부분이 정조와 관련된 유적이다. 잘 알려진 대로 화성은 전통적인 축성방법에 근대 서양 건축공법을 원용해 축조한 성이다. 효성이 지극한 정조는 뒤주에 갇혀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며 1794년부터 96년까지 이곳에 대역사를 펼쳤다.
인천의 사진은 당시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 부두의 풍경을 담고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1883년 1월 개항한 인천은 서울과 가까워 외국인의 출입이 잦고 외국상사도 많이 주재했던 곳이다.
개성은 고려의 수도였고 조선시대에도 유수관(留守官)이 파견된 지역이다. 선죽교와 두문동비 등 고려의 충절이 서린 명소를 비롯해 태조릉과 관음사 등 고려 유적을 담은 사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인삼밭 사진도 흥미롭다. 그밖에 경기지역에 속하는 유적으로는 북한산 중흥사의 대웅전,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파주 광탄의 쌍미륵 사진이 있다.
충청도에서는 공주와 충주 사진이 몇 장 포함되었다. 공주는 공산성에서 찍은 것이고, 충주는 임경업을 기리는 충렬사와 약사, 육각정 등을 찾을 수 있다. 은진 관촉사 미륵불도 렌즈에 담겼다. 전라도는 군산과 목포의 일본인 거류지와 이사청을 찍은 사진뿐이다.
경상지역의 경우, 대구의 사진은 별로 없지만 달성공원에 세운 신사로 보이는 사진이 이채롭다. 부산을 찍은 사진은 모두 일본인과 관련된 것이다. 1876년 개항한 부산은 한국 침략을 도모하는 일본의 전초기지였기 때문이다. 초량을 거류지로 삼은 일제는 그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1905년 개설되어 시모노세키(下關)와 부산을 오간 관부연락선을 통해 일본 국내와 한국을 연결시켰다. 또한 경부선 철도를 개통해 서울과의 거리를 시간적으로 크게 줄였으며 부산 연안 개펄을 매립해 시가지와 항만을 확장했다. 사진에 보이는 잔교나 매립지, 세관공사 등은 그 과정의 일면을 담은 풍경이다.
함경도 지역은 주로 함흥과 회령의 풍경을 담고 있다. 청나라 지역인 간도 두 곳의 시가지와 안둥(지금의 단둥) 부두 사진도 포함되어 있다. 함흥은 함경도의 중심도시로 함흥평야를 비롯해 역사 유적도 적지 않은 곳이다. 두만강가의 국경도시인 회령은 청국과의 무역 및 탄광지로 유명했다. 한국인이 대거 이주한 간도지방의 훈춘 및 옌지의 시가지 풍경이 일본인이 한국을 촬영한 사진집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간도가 한반도 생활공간의 일부였음을 말해준다고 할 것이다.
개항장 이외의 지역은 대체로 고적과 풍경을 담고 있다. 한가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소중한 사진들이다. 이제는 사라져 볼 수 없는 고적이 적지 않고, 변해버린 풍광까지 감안하면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이미지들이 대부분이다. 언뜻 보기에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은 듯한 100년 전 고적의 모습에서 우리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걸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가두어 가꾸지 않고 사람들과 함께 숨쉬던 고적의 풍경이 더 정겨워 보인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당장이라도 삼천리 강산 곳곳에 오늘날까지 남아 숨쉬는 고적을 찾아 둘러보고 싶은 마음이 절로 일어날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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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릉(健陵) 경기도 화성군 안녕리에 있는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의 합장릉. 홍살문 뒤에 제례를 치르는 정자각(丁字閣)이 있다. 정조가 승하한 직후에는 부친 사도세자(思悼世子) 묘인 현륭원(顯隆園 ; 현재의 융릉) 동쪽에 능을 만들었지만 훗날 왕후와 합장하며 서쪽으로 옮겨 건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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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의 서호(西湖) 화성의 서쪽에는 농업용 관개시설로 만든 인공호수 축만제(祝萬堤)가 있다. 서호라고도 하며 정조 때 축조됐다. 항미정(杭尾亭)이라는 정자가 이곳의 경관과 풍치를 돋보이게 했는데, 사진은 항미정에서 바라본 서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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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 1906년 일제 통감부가 일본 농법의 한국 이식을 목적으로 수원에 세운 기관이 권업모범장이다. 한국 농업의 시험·조사보다는 일본 농법의 지도·권장에 치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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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화수류정과 용연(龍淵) 방화수류정은 용두암(龍頭岩) 위에 세워졌으며 아래에 있는 연못은 용연이라 불렀다. 용연 주위에는 버드나무를 심어 수원 성곽 주변에서 가장 경관이 좋았다. 못가에는 돌로 만든 용두가 자리잡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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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주사(龍珠寺) 경기도 화성군 화산(花山)에 있는 절. 정조가 부친 사도세자의 묘인 현륭원을 관리하기 위해 세운 능사(陵寺)다. 정조가 김홍도(金弘道)에게 그리게 해 목판으로 만든 ‘불설부모은중경판(佛說父母恩重經板)’이 보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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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남제(南堤)의 버드나무길 남제는 수원 남쪽에 있는 저수지로 순조대에 축조되었다. 이 곳의 긴 버드나무길은 남제장류(南堤長柳)라 하여 수원8경 가운데 하나였다. 소에 물건을 싣고 지나던 장정이 사진에 담겼다. 우산을 든 모습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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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부두 배에 실을 물건과 부린 물건이 즐비하게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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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관아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은 조선시대에 개성부가 되어 유수(留守)가 파견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격하되었다가 1930년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문루는 이층으로 위층엔 마루를, 아래층엔 4각으로 다듬은 돌기둥을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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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선죽교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곳으로 알려진 개성의 돌다리. 앞에 보이는 비각에는 정몽주의 사적을 새긴 비석이 있다. 아직도 정몽주의 혈흔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는 다리 옆 시내에서 아낙들이 빨래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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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에서 바라본 금강 공주 공산성(公山城) 쌍수정(雙樹亭)에서 금강을 내려다본 풍경. 인조는 이괄(李适)의 난을 피해 이곳에 잠시 머문 적이 있는데, 쌍수정은 이를 기념하기 위해 영조대에 세워졌다는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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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관아 비석 조선시대 관아 근처에는 전임 수령을 기리는 비석이 많았다. 대개는 수령들의 치적과 무관하게 만들어지곤 했다고 한다. 사진 전면의 비석에 새겨진 희미한 글귀로 보아 어느 현감의 ‘불망비(不忘碑)’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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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거리 상점들이 즐비한 대구의 거리. 한복 차림을 한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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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초량 부산 용두산 아래 초량은 숙종대부터 왜관(倭館)이 있던 곳. 개항 이후 이곳은 일본인 거류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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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매립지 부산은 연안의 땅이 몹시 좁았기 때문에 새로운 땅을 만들기 위해 1902년 개펄 매립공사를 시작했다. 매립지에 부산역 부지가 만들어지고 부두지역이 확대되어 세관과 제1부두가 완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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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항 잔교(棧橋) 1905년 관부연락선이 취항하자 일본에서 한국으로 오는 일본인이 크게 증가했다. 이에 일제는 1906년 항만에 철도잔교를 놓아 통행을 도왔다가 1918년에 철거했다. 사진은 관부연락선에서 내려 잔교를 건너는 일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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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세관 부산이 무역항이 되면서 관세수입이 증가하자 1882년 해관(海關)이 설치되었다. 부산세관으로 이름이 바뀐 1906년 무렵 일본인들은 세관을 새로 지었다. 사진은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나르는 장면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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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일본군수비대 1895년 일본군이 부산에 주둔했지만, 이 무렵 한국군은 본래 있던 군진과 수영마저 폐지되고 진위대(鎭衛隊)도 파견되지 않았다. 일본군수비대는 송현산 북쪽 기슭에 병사를 짓고 주둔하다가 훗날 대신동으로 자리를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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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이사청과 우편국 목포는 1897년 개항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면서 일본영사관이 이사청으로 개편되었다. 이 건물을 중심으로 일본 기관들이 들어섰고 일본인 거류지가 형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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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 전경 1899년 개항한 군산은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으로 보내는 항구였다. 미곡반출의 관문이었던 것. 사진에 한옥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일본인 거류지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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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 시가 바다가 보이는 목포 시가지. 일본인 거류지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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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남대문 함흥성의 정문으로 남화문(南華門)이라고도 불린 2층 누각. 왼쪽에 보이는 종각의 범종은 현종 때 주조된 것이라고 한다. 오가는 사람이 많고 상점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함흥의 중심지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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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북문과 성천강 함경도에서 가장 넓은 평야인 함흥평야를 가로지르는 강이 성천강이다. 함흥 북문은 성천강으로 나가는 관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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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흥 향교 조선 초기에 현유(賢儒) 배향과 지방민의 교육 및 교화를 위해 창건되었다. 유생들이 모여 있는 누각이 제월루(霽月樓)다. 대성전과 명륜당 등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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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령 시가지 회령은 함경북도 국경지역으로 조선 후기부터 청국과 무역을 하던 곳이다. 두만강 연안의 이 도시는 탄광 덕분에 빠르게 발전했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의 회령 시가지에 소달구지들이 분주히 오간다. 오른쪽 산 중턱에 성문이 보인다. 전선줄이 하늘을 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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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로 두만강을 건너는 풍경 두만강을 건너면 간도(間島)다. 많은 한국인이 궁핍한 생활을 벗어나기 위해 두만강을 건너 간도지방으로 이주했다. 두만강을 건너는 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본 관헌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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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춘(琿春) 시가 훈춘은 중국 지린성(吉林省) 훈춘현의 중심지로, 간도로 이주한 한국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곳이다. 1920년 이른바 ‘훈춘 사건’이 일어나 많은 한국인이 일본군에게 죽임을 당하기도 한 가슴 시린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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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지(延吉) 국자가(局子街) 중국 지린성의 옌지에도 한국인이 많이 살았다. 지금은 옌볜조선족자치주의 주도(州都)가 되었다. 국자가는 옌지의 중심지인데, 사진은 청나라 사람들이 오가는 모습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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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둥현(安東縣) 부두 중국 랴오닝성(遼寧省)의 도시로 지금의 단둥(丹東). 평안북도 신의주와는 철교로 연결돼 있다. 한국인들이 만주나 중국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관문이었다. 사진은 안둥 부두에 정박한 한국 사람들의 목선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