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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

*설향* 2007. 9. 14. 13:59
 

경남 산청군 시천면 원리에 가면 길 양쪽에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하동에서 황천을 거쳐 59번도로를 이용 산청으로 넘어가는 길은 가히 걱정스러울 정도로 길이 않좋다. 전대마을을 지나 위태삼거리를 그런대로 통과 조금 산속으로 오르면 도로는 끝이 나고 만다. 왼쪽엔 스레트 지붕을 한 오대사라는 작은 사찰이 있는 그곳에서부터 임도만도 못한 경운기 길같은 국도가 시작된다. 이곳에서 내공리로 내려가는 길은 뒷머리가 쭈뼛하게 해준다. 이곳에서 외공 마을을 통과 시천천을 따라 내려가다 만난 곳이 남명선생 유적지 이다.

남명 조식선생은 본관 창녕(昌寧). 자 건중(楗仲). 호 남명(南冥). 시호 문정(文貞). 김우옹(金宇) ·곽재우(郭再祐)는 그의 문인이자 외손녀 사위이다. 삼가현(三嘉縣:지금의 합천) 토골[兎洞]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20대 중반까지는 대체로 서울에 살면서 성수침(成守琛) ·성운(成運)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열중하였고,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全)》을 읽고 깨달은 바 있어 이때부터 성리학에 전념하였다. 30세 때 처가가 있는 김해 탄동(炭洞)으로 이사하여 산해정(山海亭)을 짖고 살면서 학문에 정진하였다.

1538년 유일(遺逸)로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임명되었지만 관직에 나아가지 않다가, 45세 때 고향 삼가현에 돌아온 후 계복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살면서 제자들 교육에도 힘썼다. 1548~1559년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 ·단성현감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모두 사퇴하였다.

[남명 조식 유적관 입구인 성성문, 깨달음을 두번이나...]

[남명 조식선생 유적지 안내문...]

[남명 조식선생의 석상...]

남명 조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며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健中), 호는 남명(南冥)이다. 그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제자교육에 힘썼다. 그는 공리공담(公理空談)에 치중한 대부분의 성리학자과 달리, 가까운 현실생활에서부터 학문을 추구하고 실천을 강조하며, 후학들을 양성한, 조선시대에 흔하지 않은 교육자이다. 조식은 원시유학의 천리공부에 역점을 두고 존심양성(存心養性)과 궁리(窮理)와 실천(實踐) 그리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수득하는 것에 수학(修學)의 목적을 두었다.

조식은 도덕적인 덕행을 세우는 데에 그의 학문적 목적을 두었다. 이와 같이 도덕적 덕행을 세우는 데에 학문의 목적을 두고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유학이념에 투철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교육의 목적을 성리학적 이학에 근본을 두고, 실천하는 과정에서 敬과 義의 사상을 지행하는 것을 교육의 목적을 삼은 것이다. 그는 敬과 義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말했다. ‘內明者는 敬이요, 外斷恣는 義’이는 “안으로 밝음이 경건함이고, 밖으로 자르는 것이 의로움이다.” 라는 뜻이다.

즉 이는 그의 칼은 안으로는 경을 통한 수양과 극기, 밖으로는 의의 기개로 현실의 부조리를 극복해가는 실천적 유학을 상징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식은 敬과 義를 일생의 교육목적으로 삼아 제자교육에 전력투구를 하였다. 후에, 그가 만년이 되었을 때, 그의 제작들이 찾아와 서 마지막 가르침을 청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敬과 義의 두글자가 학자에게 가장 간절하다. 요는 공부를 익숙하게 하는데 있으니 익숙하면 한가지도 가슴 가운데 거리끼는 것이 없을 것이다. 나는 아직 그러나 경지에 이르지 못하고 죽는다.

[가까이에서 올려다본 조식선생의 인자함이 보이고...]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 ...]

[우암 송시열이 지은 신도비를 한글로 국역해놓은 비...]

[남명기념관 이라 쓰인 조식선생의 유적 전시관, 물론 월요일은 휴관...]

[입구에 여재실 건물이 보이고...]

[재실 들어서는 입구 문이 활짝 열려있어...]

[재실이라 쓰인 현판이 거려있고...]

[여재실 안내문...]

[위패를 모신곳으로 보이고...]

[여재실 근처에는 커다란 석류가 열린 석류나무 들이 많이 심어져...]

[말나리로 여겨지는 데 키가 2미터도 넘는 것 같아...]

[염주나무 열매 라네요...]

[남명 조식선생 석상앞엔 커다란 나무들이...]

[기념관앞 넓은 뜰에 묘하게 생긴 나무가...]

[유적기념과 건너편 산천재 안내문...]

[산천재 입구에 고가옥이...]

[입구 쪽문이 정서를 말해주는...]

[산천재라고 쓰여진 현판이 달린...]

[산천재 안내문...]

[산천재 대청에 걸려있는 현액엔...]

[산천재의 옆모양...]

[건물엔 남명 문학 특강중이라는 문구도...]

[남명 문집 책판 안내문...]

[남명 문집 책판 보관 건물...]

[산천재 근처엔 때 맞추어 배롱나무 꽃들이 한창...]

[주춧돌의 모양이 독특한데...]

[건물의 주춧돌로 쓰여 지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남명선생 시비...]

[산천재에서 건너다 본 유적기념관 앞 주차장...]

남명 조식선생의 유적지를 돌아보고 또 조식선생의 흩어져 있는 관련 유적지를 생각해 보면 조식선생의 지리산 사랑과 천왕봉이 보이는 이곳에 터전을 잡고 교육을 위해 애쓰신 그런 생각을 하며 묘소를 들어왔어야 했는데 사전 자료를 모르고 간 연유로 지척에 모신 묘소를 들러 오지 못해 조금 아쉬움이 서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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